1895년 6월 우편사업을 다시 시작했을 때 지금의 우체국은 ‘우체사’라 불렸다. 1884년 우정총국을 설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한성(서울)과 인천 두 곳에만 우체사를 설치하고 우편 업무를 시작했다. 바로 그 해 우체사관제를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24개 지역에 우체사를 설치하기로 했다. 24개 지역이란 23개 부청(府廳) 소재지에 원산을 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96년 말까지 세워진 우체사가 1등 우체사 11개, 2등 우체사가 13개, 지사 1개로 모두 25개 사였다. 그 뒤 1898년 임시우체사제도가 실시되면서 우체사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우체사’라는 명칭이 ‘우편국’으로 바뀐 것은 우리나라 통신권을 일본에 빼앗기면서부터였다. 1905년 한일통신기관협정을 강요하여 우리나라 통신기관을 강탈한 일제는 우체사의 명칭을 일본식인 우편국으로 바꾸고 금융 업무까지 취급하며 일본식으로 운영했다. 그때부터 우체사의 명칭은 우편국으로 굳어졌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고 나서도 우편국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1947년 1월 체신부는 일본식으로 되어 있는 우편국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면서도 우편국이라는 일본식 용어를 우리 고유어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실로 우연한 기회에 우편국이라는 말을 우체국으로 바꾸게 되었기에 그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체신부 초대 간부들
왜색의 잔재를
제거하는 작업을
전개하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은 체신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4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일본어 사용을 중지해야 하고, 창씨개명 한 일본식 이름을 버려야 하고, 일본식으로 된 관공서 명칭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일본식으로 된 통신 용어를 개정하는 것도 못지않게 시급한 과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를 국어라 해서 상용(常用)하도록 강요당했기에 일제의 잔재 중에서 맨 먼저 청산해야 할 것은 바로 일본어였다. 그럼에도 우리 힘으로 쟁취한 광복이 아니었기에 일본어를 버리는 일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는 한편 일본어의 사용도 허용했다. 우리 국민이 거세게 항의하자 미 군정청은 1946년 6월에야 비로소 한국어를 공용어로 정했다.
창씨개명 한 일본식 이름을 우리식 이름으로 고친 것은 그보다 빨랐다. 체신부에서도 광복 후 한두 달은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의 ‘체신공보’를 보면 그 해 10월 9일 자의 ‘인사이동’란에서 처음으로 한국식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그 뒤 11월 14일 자 ‘체신공보’에는 일본식 이름이 사라지고 한국식으로 바뀌었다. 이어 12월 22일에는 한국인 우편저금 가입자에게 명의변경계를 제출하도록 독려한 것으로 보아 각종 업무용 서류에서 일본식 이름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체신관서의 명칭이 한국식으로 바뀐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체신부는 1947년 1월 1일 일본식으로 된 우편국의 명칭을 일제히 한국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단행했다. 예컨대, ‘경성’은 우리 고유의 이름인 ‘서울’로 고쳤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본정(本町), 황금정(黃金町), 병목정(竝木町), 연병정(練兵町) 등은 각각 충무로, 을지로, 쌍림동, 남영동으로 바꿨다. 그리하여 ‘경성황금정1우편국’이 ‘서울을지로1우편국’으로 바뀌었다. ‘경성부’가 공식적으로 ‘서울시’가 되고 ‘정(町)’이 ‘동’으로 바뀐 것이 1947년 8월이므로 체신부는 서울시보다 먼저 왜색 청산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낱말인 ‘우편국’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일본식 통신 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체신국은 1945년 12월 문서를 통해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해 체신공무원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었다. 이때 많은 용어가 우리말로 바뀌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우편절수’가 ‘우표’, ‘병행낭갑( 行囊甲)’이 ‘1호행낭’, ‘행낭괘(行囊掛)’가 ‘행낭걸이’로 바뀐 것을 들 수 있었다.
왜색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어졌다. 체신부는 1947년 4월 ‘왜색 잔재 완전 제거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각 현업관서에 발송했다. “해방 후 3년에 이른 오늘에 있어서 아직 우리의 직장과 생활 주위에서 간혹 왜정시대의 욕된 흔적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여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왜어(倭語)를 사용하며, 청사 내외의 게시 등에도 왜어를 쓴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국소명(局所名) 간판에 왜어 관계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민족적 치욕을 청산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체신부는 공문을 통해 그처럼 문제점을 지적하고, ①직원의 일본어 사용 금지 ②청사 내외의 간판, 게시판 등에 관한 전반적인 재검사 ③문서와 각종 기록의 용어, 문구 혁신에 의한 일본어 준용(準用) 배제 ④기성 장부와 용지 등에 기재된 일본어의 국어로의 개서(改書) 등의 사항을 철저히 시행하여 왜정 잔재 제거에 특별히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처럼 왜색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으로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통신 용어를 우리 식으로 바꾸기도 했는데, ‘우편국’이 ‘우체국’으로 바뀐 배경에는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일화가 담겨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천우편국
전무국에서우편국이라는
명칭을
바꿔 달라고요구하다
체신부 내에서 ‘우편국’이라는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우정국 사람들이 아니고 전신전화 업무를 담당하는 전무국 사람들이었다.
‘우편국’ 하면 우편 업무만 취급하는 관청이라는 인상을 풍기므로 전신전화 업무도 같이 취급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일제강점기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일본식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8·15 광복 당시만 해도 전신이나 전화 업무만을 독립적으로 취급하는 현업기관은 거의 없었다. 경성중앙전신국과 경성중앙전화국이 독립적인 건물을 가지고 전신과 전화 업무만을 취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밖에 광화문분국과 용산분국, 동분국 등이 경성중앙전화국의 분국 형태로 전화 업무를 취급하고 있었다. 그 밖의 현업기관은 우편국이라는 이름 아래 우편국 건물에서 우편 업무와 함께 전신전화 업무를 취급했다. 그처럼 우편국 건물에서 한솥밥을 먹고 지내는 동안, 기술직인 전신전화 분야 직원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비교적 전문 기술이 필요하지 않는 우편 업무에 비해 어려운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행정직인 우체국장 밑에서 서자 취급을 받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가급적 독립적인 건물을 세워 전신전화사업을 별도로 운영하고 싶어 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방체신국 분리론이었다. 미군정청 시절, 그들은 뒷날의 체신청에 해당하는 지방체신국을 분리하여 전신전화사업 분야만을 관리하는 지방전무국을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고 두 차례나 건의한 일이 있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자 다시 그 문제가 불거졌다. 전무국에서 우편국의 명칭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함에 따라 그 문제가 체신부 국장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우편국’을 대신할 이름으로 ‘우편전신전화국’, ‘우정전무국’, ‘체신국’ 등 3개 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어느 명칭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편전신전화국’이나 ‘우정전무국’은 우편과 전신전화사업을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으나, 저금·보험·연금 등 부대사업을 대변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본부의 우정국이나 전무국의 명칭과 중복되는 느낌이 있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방체신국’을 ‘체신청’으로 개칭한다는 전제하에 ‘우편국’을 ‘체신국’으로 개칭한다는 안 역시 환영받지 못했다. 우편국의 개칭 문제는 그처럼 아무런 결론 없이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관 박용하가 우정국장 최재호를 불러 그 문제를 거론했다. “우편국의 명칭을 어떻게 변경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연구해 보았으나 적당한 명칭을 찾지 못했는데, 우체국이라 하면 어떻겠소? 우체국이라는 명칭은 지난번 주요지 국장회의 때 대통령 각하께서 ‘우체 사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신 유시(諭示)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박용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최재호의 반응을 살폈다.
‘주요지 국장회의’란 1949년 3월 8일부터 이틀 동안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체신부 간부회의를 말한다. 그 날의 회의에는 사무관 이상의 우체국장 등 주요 간부 100여 명이 참석했는데, 체신부가 중앙청 회의실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또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체신부 간부회의에 참석하여 유시와 훈시를 한 것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 날의 회의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우체 사무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계가 깊은 것이니 각자가 임무 수행에 헌신 노력할 것이며, 우편국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배치해 외국인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의 유시를 했다.
우편국이라는 낱말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는 최재호는 우체국으로 개칭하자는 말에 선뜻 찬성하지 않았다. ‘우체사’라는 낱말은 우편사업을 시작한 개화기에 사용한 명칭이어서 ‘우체국’으로 개칭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개화기의 우체사에서는 우편업무만 취급했다. 전신전화는 물론 보험·연금 등의 부대업무도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편국’을 ‘우체국’으로 부르게 되면, 순전히 우편업무만 취급하는 기관이라는 냄새를 짙게 풍기므로 전혀 개칭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
최재호가 그렇게 설명하자, 박용하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지금 전무국에선 지방전무국을 설치하려다 실패해서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있는데, 이 일마저 좌절되면 실망이 클 거요. 이론이 어떻든 일제 때의 명칭을 버리고 구한국시대의 명칭으로 바꾸는 것은 무방할 테니, 우체국으로 개칭하도록 합시다. 전무국장은 이미 찬성했고, 다른 국장들도 별 이의가 없소.” 상사인 박용하가 그처럼 사정조로 나오자, 소신파인 최재호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차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로 한 발 물러섰다.
경성우편국
‘우편’
관련 용어를
동시에 개정하지못한 점이
아쉬웠다
‘우편국’이라는 명칭은 1949년 8월 그렇게 ‘우체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편국과 우체국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두 낱말이 풍기는 의미에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편국을 우체국으로 부른다 해서 전신전화사업을 같이 취급하는 관서라는 느낌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우편국이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 기술직 간부들이 감정싸움에 몰입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 이번만큼은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했을 뿐, 더 좋은 명칭으로 바꿨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무국장 황갑성은 사석에서 그렇게 토로했다.우편국의 명칭을 우체국으로 고친 것은 왜색 잔재의 청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일본에 강요당한 낱말을 버리고 구한국시대에 쓰던 용어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쉬움으로 남는 점이 있었다. 기왕 우체국으로 고칠 바에는 ‘우편’과 관련된 용어는 모두 ‘우체’로 바꿨어야 했음에도 우체국이라는 낱말만 고친 점이다.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는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기해야 할 것이다.
✽유시(諭示) : 관청 따위에서 국민을 타일러 가르침 또는 그런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