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우편과장이
우표와 우표책을
착복하다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만 해도 우정국에서 발행한 우표는 경리국에서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특수 용도로 사용하게 되는 우표는 우정국에서도 보관했다. 다시 말해, 우표첩 제조에 필요하거나 UPU 회원국에 보내거나 영구 보존용 등으로 새 우표를 발행할 때마다 1만 매(100매로 된 전지 100장)를 우정국에서 보관, 관리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만 해도 체신부 우정국에는 구한국시대와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우표는 물론 8·15광복 이후에 발행한 각종 우표와 소형시트, 우표첩 등이 상당수 보관되어 있었다.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그들 우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체신부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우표는 창고가 불타는 바람에 소실되었고, 우정국에서 보관하고 있던 우표는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본부 창고에 있던 우표도 소문처럼 인민군이 멋대로 처분했거나 누군가가 UN군을 상대로 행낭째 거래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8·15광복 이후에 발행된 우표는 외국의 수집가나 우표상을 통해 역수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와중에 우정국 내부에서 우표 사고가 발생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사고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UPU 회원국에 보낼 우리나라 우표를 보내지 않고 사취한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보내온 우표를 보관하지 않고 나누어 가진 것이었다. UPU 회원국은 새로운 우표를 발행할 때마다 UPU 국제사무국을 통해 각 회원국에 3매씩 송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처럼 각 회원국에 보내야 할 우표를 보내지 않고 착복한 데다, 외국에서 보내온 우표마저 착복했으니 정말 간 큰 도둑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5월 30일에 발행한 제2회 총선거 기념우표부터 서류상으로는 각 회원국에 보낸 것으로 기록해 놓고 실제로는 한 매도 보내지 않았다. 또한 각 회원국에서 보내온 우표를 장관과 차관에게 증정하고, 나머지는 국장과 과장들이 적당히 분배했다. 그러다 보니 보관되어 있는 우표는 한 장도 없었다. 그 사실은 체신부의 자체 감사를 통해 밝혀졌는데, 주범은 뜻밖에도 국제우편과장 김 모였다. 김 모는 장기영이 2대 장관으로 부임할 때 거느리고 온 외인부대였다.
그는 우정국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국내우편과장의 소관 사항인 우표 발행업무까지 맡아 만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과원들과도 상의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착복한 것은 또 있었다. UPU 국제사무국에서 보낸 ‘UPU 창설 75주년 기념우표’ 앨범도 마음대로 처분했다. 그 앨범은 UPU 창설 75주년을 맞아 각 회원국에서 발행한 기념우표를 모아 만든 것이어서 꽤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UPU 국제사무국에서 몇 부를 보내 왔으며, 그것을 어떻게 배부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항간에는 UPU에서 보낸 앨범이 총 30부인데 그중에서 상당수가 시중에 유출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주인공은 사직한 지 오래인 데다 관련 문서까지 파기했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체신부의 근무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국제우편과장이라는 요직을 맡긴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것이나 진배없었다. 정부 수립 직후인,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청와대로 보내는
기념우표 수부터
칼질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념우표가 발행되면 UPU 회원국에도 보내야 하지만, 국내에서도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기관의 요직에 있는 인사에게 기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중에서도 열심히 챙기는 곳이 청와대나 검찰청, 중앙정보부 같은 권력기관이었다. 우편법시행규칙에도 국제협력의 증진과 통신사업의 발전 및 우표문화의 보급 등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우표류를 기증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들 권력기관에 있는 인사에게 기념우표를 보내는 명분은 우표문화의 보급을 위해서였다. 법 규정으로 볼 때 대부분 기념우표는 보내도 그만 안 보내도 그만인 인사들에게 보내지고 있는 셈이었다. 체신부 현직자가 자신이 아는 요직의 인사에게 기념우표를 보내기 시작하면, 그것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사람이 바뀌면 보내지 않아도 될 터인데, 권력이 센 자리이다 보니 쉽게 바꿀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념우표를 보내야 할 곳은 갈수록 늘어날 뿐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와 같은 체신부의 전례 답습적인 관행에 반기를 든 사람은 젊은 사무관 석호익이었다. 석호익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체신부 우표과에 근무한 지 1년밖에 안 된 햇병아리 사무관이었다. 아직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두려울 게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한 그가 기념우표의 무분별한 기증에 제동을 걸려 한 것은 잘못된 관행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에서였다. 제5공화국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81년,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체신부 우표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청와대 조직이 바뀌었으니 기증용 우표와 우표책을 가져오라는 주문이었다. 우표과 사무관 석호익이 경제비서실 행정관 정홍식을 찾아갔다. 그는 우표책 대신 체신부 규정집을 들고 갔다. 그는 첫 대면인 정홍식에게 체신부 규정집을 내밀었다.
“이게 뭐요?” 정홍식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우표 보급에 관한 규정을 담은 체신부 규정집입니다.” “당신 지금 뭐하자는 거요?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놀리는 거요 뭐요?” 정홍식이 벌컥 화를 냈다. “보시다시피 규정에는 ‘우표문화의 보급을 위해 필요한 곳’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대로 달라고 할 수도, 마음대로 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 지금 무슨 새삼스런 얘길 하는 거요? 당신네 부처에서 자발적으로 보낸 거지, 언제 우리가 달라고 해서 보냈소?” “행정관님이 지적해 주신 바로 그게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규정을 제대로 지켜보고자 하는 겁니다.” 석호익은 정홍식에게 규정집을 펼쳐 보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무상으로 배부하는 기념우표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대로 늘어간다면 언젠가는 체신부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올 게 분명했다. 관행이 고착되고 나면 바로잡기도 힘들거니와 저항도 세질 것이다. 따라서 일을 미루다 키우기보다 기회를 보아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데, 새로운 정권이 출발하는 현시점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적기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럼 도대체 ‘우표문화의 보급을 위해 필요한 곳’의 범위가 어디까지라는 거요?” 정홍식이 물었다. 사실 애매한 문구였다.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로 해석할 수 있는 문구였다. 그러다 보니 힘 있는 기관 위주로 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너무 광의로 해석되어 버린 게 사실입니다. 때문에 청와대부터 그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 주시기 바라는 뜻에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럼 내가 포기하면 다른 곳에도 규정을 철저하게 적용할 수 있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석호익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았으니 그냥 가시오. 어디 두고 봅시다. 나중에 못해 내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을 테니.” 정홍식은 쉽게 양보했으나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음을 먹었다 해서 무턱대고 그냥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청와대부터 배부해야 할 곳의 기준을 정해 주십시오. 그래야 힘이 실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정홍식은 생각보다 화끈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기증 대상을 줄여 대통령과 수석비서관 전원, 경제수석실 비서관 등으로 제한했다. 덕분에 청와대로 보내던 기념우표 수량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개인 돈으로
우표를 사서
보내다
청와대 행정관 정홍식의 결단은 우표과 신참 사무관 석호익에게 천군만마의 힘이 되었다. 체신부로 돌아가자 석호익은 앞으로 기념우표의 기증 대상을 대폭 줄이겠다고 큰소리쳤다. 우표과장 최전교와 실무자 남정현이 쓸데없는 만용이라며 말렸다. 섣불리 행동하다간 권력기관으로부터 미움만 사다 결국 다시 보내게 될 것이니 괜한 짓 하지 말라며 타일렀다. 그러나 석호익은 뜻을 꺾지 않았다. 그와 같은 잘못된 관행은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정권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즉시 그동안 보내고 있던 대검찰청, 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의 기증 대상을 대폭 줄였다. 권력기관이 아니더라도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반 행정기관의 기증 대상도 칼질했다. 우표문화의 보급을 위해 필요한 곳이라 인정되는 곳도 현재 직책에 있는 사람 외에는 모두 중단했다.
당시는 우표의 수집 가치가 높던 때라 새 우표가 발행되면 오래지 않아 웃돈이 붙었다. 새 우표가 발행되면 우표 마니아들은 서울중앙우체국 청사 앞에서 밤새워 기다리고 있다 구입하기도 했다. 그처럼 인기를 끌던 우표와 우표책의 공급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 왔다. 항의 전화는 주로 국장이나 과장 등 윗사람에게 걸려 왔다. 그때마다 계장 석호익이 불려 가 설명해야만 했다. 그는 우표가 꼭 필요하다면 체신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우편주문판매제도를 이용하라고 권했다. 우편주문판매제도는 그 뒤 지역 특산품 등 여러 가지 상품으로 확대되었으나, 당시는 우표에 한해 실시하고 있었다. 물론 항의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우표를 구입하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새 우표가 발행될 때마다 사무실에 편히 앉아 남보다 먼저 받는다는, 신분을 과시할 수 있는 즐거움을 놓치기 싫을 뿐, 우편주문판매제도를 이용하면서까지 우표를 구입하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군말하지 말고 보내라고 윽박지르며 제삼자를 통해 간접적인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그때마다 석호익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규정상으로 안 되게 되어 있어 청와대도 자진해서 줄였습니다만, 정 그러시다면 제 돈으로 사서 보내 드리지요. 공무원 월급이 적긴 하나 그 정도 선물이야 못해 드리겠습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우표를 사서 보내되, 발송인을 체신부장관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해서 보냈다. 물론 상대방은 그와 같은 공짜 기증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몇 차례 받다 더 이상 보내지 말라며 사양하곤 했다. 돈으로 따지면 몇 푼 안 되지만, 공직자가 앞장서 지켜야 할 국가 재산을 권력자에게 마음대로 선사하던 잘못된 관행은 그렇게 시정되었다. 권력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젊은 사무관의 정의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