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호에 이어
개화의 첫번째 작품인 우정총국 설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개국일로부터 16일 뒤인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열기로 했다. 그 뜻깊은 행사에 불순한 음모가 끼어들었다. 뒷날 갑신정변이라 불린 쿠데타 음모였다.
고종의 개화 의지에 힘입어 개화파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수구파와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권력의 실세인 민영익이 수구파로 변신하면서 어느 정도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던 양자 간의 균형이 깨졌다.
그 해 8월 친군영제(親軍營制)가 실시되고 수구파가 전영사, 후영사, 좌영사, 우영사 등 4영사(營使)를 맡아 군권을 장악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개화파가 정변을 꾀했다. 청불전쟁의 발발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절반이 본국으로 소환된 데다 청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호재로 작용했다. 게다가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일본군으로 돕겠다며 개화파를 부추겼다.
쿠데타의 목표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민영익 이하 수구사대파를 제거하고 청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를 이룩한다. 둘째, 궁중의 미신과 요망스러운 자들을 소탕하여 민비로 하여금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한다. 셋째, 유능한 인재로 책임내각을 구성하여 내정을 혁신한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수구파 거두들을 제거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곳에서는 민영익에게 자상을 입혔을 뿐 요인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 쿠데타 주체 세력은 그 길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청병이 난리를 일으켰으므로 근처에 있는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야 한다고 거짓 보고하고, 일본 공사에게 병력을 요청하는 글을 쓰도록 압력을 가했다. 임금의 거처를 굳이 경우궁으로 옮기려 한 것은 궁궐이 좁아 일본군이 수비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일본 공사는 짐을 보호하라(日本公使來護朕)”는 내용의 글을 써 보내고 경우궁으로 옮겼다.
고종의 밀지를 받자 일본공사 다케조에 (竹添進一郞)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는 듯이 달려와 대궐을 호위했다. 정변 소식에 놀란 수구파 대신들이 황급히 경우궁으로 달려갔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장사들이 민영목, 민태호,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조영하 등 수구파 거두들을 하나하나 처치했다.
수구파를 제거하는 작업에 성공하자, 쿠데타 주역들은 혁명정부를 구성했다.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영의정 이재원(대원군 맏형의 아들),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호조참판 김옥균, 예조판서 김윤식 등으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갑신정변의 혁명정부는 그렇게 출범했다.
대가를 따른
홍영식
느닷없이 참변을 당한 민씨 일가가 손을 맺고 앉아 있을 리 없었다.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위안스카이(袁世凱)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은 150명에 불과했고, 개화파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 역시 비슷한 숫자였다. 아직도 1,500명이나 남아 있는 청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였다. 경기감사 심상훈이 몰래 고종을 알현하고 정변의 내용을 상세히 알렸다. 개화파에 속았음을 깨달은 고종이 창덕궁으로 환궁하도록 지시하자,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마지못해 고종을 모시고 창덕궁으로 돌아갔다.정변이 일어난 지 3일째 되던 날 오후, 창경궁에서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 수백 명이 왕궁을 호위한다는 구실로 대궐에 침입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다케조에와 함께 고종의 어가를 모시고 창경궁 후원으로 도피했다. 민비는 이미 세자와 궁녀들을 거느리고 궁문을 나와 청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묘로 도피했고, 김옥균 등은 북묘로 가려는 고종을 붙잡고 있었다. 박영효가 일본군과 함께 옥류천 쪽으로 쳐들어오는 청병과 교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사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옥균과 서광범은 어가를 협박해서라도 인천으로 가자고 했다. 다케조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고종은 결단코 인천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산 위에서 청군과 같이 있던 조선 별초군 100여 명이 일행을 향해 포를 쏘았다. 일이 비꾸러짐을 깨달은 다케조에가 잠시 군사를 철수하여 선후책을 강구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갈수록 불안감을 느낀 고종은 급히 북묘로 가자며 서둘렀다.
임금을 따라 북묘로 갈 것이냐 인천으로 도피할 것이냐, 김옥균 등은 양자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임금을 따라 북묘로 가자니 청군에게 붙잡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인천으로 도망가자니 그 길 역시 못지않게 험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할 수 없어 다케조에에게 묻자, 청군이 무례한 행동으로 양국의 체면을 더럽혔으므로 일본이 마땅히 병력으로 응징할 것이니 자신을 따르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은 다케조에와 행동을 같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홍영식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본디 성격이 인후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했다. 정변이 일어난 뒤에도 병정을 보내 민영익을 보호했으며, 위안스카이와의 교분도 두터웠다. 제반 여건으로 보아 굳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김옥균 등이 같이 일본으로 가자고 했으나, 홍영식은 임금을 홀로 두고 떠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어가를 따르겠다고 했다. 김옥균 등은 작별을 고하고 다케조에와 함께 인천으로 떠났다.
동지들을 떠나보낸 홍영식은 고종을 호종하고 북묘로 향했다. 박영효의 형 박영교가 동행했다. 북묘는 이미 청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청나라 장수 오조유(吳兆有)가 고종을 맞아 창덕궁 앞에 설치한 동별영으로 모시고 가려 했다. 홍영식이 사인교를 가로막으며 말렸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임금은 떠나고 청군에 붙잡힌 홍영식은 청군이 휘두른 총칼에 무참히 쓰러졌다. 창덕궁 뒷산에 있는 옥류천 부근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