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신문화』 100호에 실린 1964년 12월 창구에서 엿본 세모경기
경제 성장에 따라 급격히 증가한 연말 우편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7년은 전쟁의 상흔이 점차 씻겨 나가고 경제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던 때였다. 우편물 역시 매년 가파르게 그 수가 늘고 있었는데, 서구 문명(크리스마스)과 동양의 정서(연하장)가 맞물리기 시작하던 당시의 연말은 그 증가폭이 더욱 컸다. 1967년 연하 우편물만 놓고 봐도 그 양이 340만 통으로 1964년 90만 통 대비 3.7배나 증가하였으며, 우체국은 우편물 소통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뉴스에 따르면 서울 중앙우체국은 12월 15일 하루 동안만 해도 3만여 통을 취급했고, 우표 판매액도 하루 1백만 원(당시 우표가격은 5~7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1977년. 연말 우편물 규모는 더 늘어났다. 급격한 경제 성장과 맞물려 연말연시 우편물이 매해 두 자릿수 이상의 증가를 보이며 약 8천여만 통이 취급되었다. 당시에는 웃지 못할 사건들도 있었는데, 그때엔 우편 제도 상 규격 봉투를 쓰지 않거나 우편번호를 쓰지 않을 경우 수취인이 벌금을 무는 형태였다.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의 경우 규격외 우편물이 대다수였는데 그러다 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벌금을 요구하는 집배원과 못 내겠다는 수취인 간에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정상 요금이 20원이었는데 규격외인 경우 10원짜리 우표를 더 붙여야 했고, 그러지 않을 경우 수취인이 미납 요금 10원 외에도 추징료 10원을 더해 20원을 물었어야 하니 다툼이 있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1987년. 그해 겨울에는 대통령 선거, 이듬해 총선까지 겹치면서 우체국은 그야말로 초비상이었다. 게다가 연말 특수를 노리는 광고우편물도 급증하다보니 우체국의 모든 직원은 물론 임시직, 자원봉사자 등이 총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연말연시 우편물이 약 3억여 통에 가깝게 소통되었으니, 근무시간 연장은 다반사였고 수시로 철야 작업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IMF 이후 대폭 감소한 연하장이 그리운 요즘
1997년 12월은 IMF의 여파로 인해 경제가 위축되고 사회적으로도 침체된 분위기였다. 그에 따라 연말 우편물 또한 큰 폭으로 감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대구우체국 21.3%, 대구수성우체국 42.3% 감소를 비롯해 대구 시내 우체국의 우편 접수량이 평균 20%가 감소했다고 한다. 늘 가파른 증가세였던 연말연시 우편물량이 최초로 줄어든 해가 아니었나 싶다.
이후 2000년에 들어서고 이메일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연말연시 우편물은 점차 감소되었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을 점점 더 보기 어렵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편지나 카드가 주는 메시지 전달 기능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감정을 전달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감성적 측면으로서는 어떨까? 손글씨로 사랑을 적어 보내던 크리스마스 카드, 상대방의 더 좋은 삶을 기원하는 새해 인사가 적힌 연하장이 그리운 건 비단 나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