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용 문위우표, 세창양행이 독점
우정총국이 폐지된 뒤 5개월이 지난 1885년 3월 주한 일본공사관은 통리 교섭 통상 사무아문에 두 궤짝의 우표를 보내며 대금 지불을 요구했다. 이미 우정총국이 폐지되었고 우편사업을 재개할 계획이 없었던지라, 조선 정부는 대금 지급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가 재정이 빈약할 때여서 760원이나 되는 우표 대금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때 총세무사 메릴(H. F. Merrill)이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쓸모없게 된 우표를 인천에 있는 세창양행에 팔아넘기기로 하고 거간꾼 노릇을 했다. 그 결과, 이듬해 1월 통리 교섭 통상 사무아문과 세창양행 사이에 우표 불하 계약이 성립되었다. 불하 대금이 얼마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휴지나 다름없는 우표가 비싸게 팔렸을 리 없다. 아무튼 조선 정부는 그 판매대금에 다 모자라는 금액을 채워 일본으로 송금했다. 문위우표 인쇄비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었다. 덕분에 세창양행은 25문· 50문·100 문의 고액권 우표 130만 매를 헐값에 손에 넣게 되었다.
뒷날 한국우표수집가들이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비록 미사용이긴 하지만, 100년이 지난 문위우표 5종을 10만 원 안팎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마이어 덕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보관하고 있던 문위우표를 조금씩 풀어놓았던 것이다.
아무튼 세트로 흘러나오는 문위우표 5 종중에서 5문과 10 문우 표의 값이 제일 비쌌다. 두 종 우표의 잔량이 적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액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긴 하지만두 종우 표가 세트로 나돌고 있다는 사실에서 5문과 10문 우표의 잔량도 세창양행에서 사들였을 거라는 추정은 쉽게 할 수 있다.
세창양행의 주인 마이어가 진짜 우표수집가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수준급의 우표수집 가였거나 상품으로써의 우표 가치를 잘 아는 사람임은 위의 사실이 웅변해 준다. 또 태극 우표가 발행되자 그는 태극 우표 4종이 붙은 수많은 봉피를 만들어 친지나 우표수집가에게 뿌렸다. 그들 봉피는오늘날의 한국 우표수집가들에게 매우 요긴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마이어의 후손은 그의 고향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다. 후손의 집에는 고종에게 하사 받은 병풍이며 조선에서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그가 수집한 한국 민속품은 함부르크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하지만 한국 우표 수집가가 간절히 바라는 문위우표 엔타이어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문위우표 엔타이어는 우표수집가의 꿈
문위우표 엔타이어가 나왔다 해서 우표 수집계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우리 수집계의 원로인 진기홍마저 진짜라고 거들었으니 흥분할 만했다. 그러나 그 작품을 정밀 진단한 수집가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은 그 작품을 진품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옛날에 가짜 어사또가 출현했듯, 가짜 문위우표가 나돈 게한도 번이 아니었다. 가짜 문위우표로 엔타이어를 만든 게 있는가 하면, 모조봉 피에 진짜 우표를 붙여 만든 엔타이어도 있었다. 엉터리 직인을 찍어야 하기에 들통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위우표가 너무나도 귀하다 보니 그런 유혹을 받게 되는 모양이다.
문위우표 엔타이어를 기대하긴 사실상 어렵다. 20일 만에 끝난 우정총국 시절에 얼마나 많은 우편물이 오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실제로 우표가 사용됐는지 의문을 제기할 만큼 이용량이 극히 적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당시의 일부인이 소인된 우표가 나타났기에 그 같은 의문은 해소됐으나, 조선 백성들에겐 낯선 제도인데다 지역적으로 서울과 인천에 국한돼 있어 실제 이용자가 있었는지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편 이용의 편리함을 아는 외국인은 꽤 이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사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역사가요 우표수집가니 문위우표 엔타이어를 발굴하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벌써 옛날에 고인이 된 미국인 앨런과 독일인 마이어의 유품이나 그 친지들의 유품에 기대를 거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