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우편 실시하고자 UPU 가입 서둘러
신식 우편제도를 도입하면서 조선 정부는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할 생각부터 했다. UPU에 가입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고종이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를 내렸을 뿐 우정총국이 채 설치되기도 전인 1884년 4월 조선 정부는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에게 UPU에 가입할 뜻을 내비치며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1893년 전우총국(電郵總局)을 설치할 때도 UPU 가입을 서둘렀다. 국제우편을 실시하려면 UPU 가입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전우총국을 설립할 당시 우편사업을 국내우편인 내체(內遞)와 국제우편인 외체(外遞)로 구분하고, 외체 담당 관원으로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C. R. Greathouse
; 具禮)를 고용했다. 그리고 미국과의 우편조약 체결을 시도했다. UPU 미가입국이 가입국과 우편조약을 맺게 되면 제3국을 경유해 국제우편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우편조약 체결에 실패하자 조선은 UPU에 직접 가입하기로 하고, 1894년 1월 외부독판 조병직이 스위스 외부장관에게 가입 신청을 했다. 이 신청서는 그 해 4월 주미 스위스공사를 통해 스위스 정부에 전달되었다. 스위스 정부는 UPU 사무국과 협의한 뒤 실시 업무의 범위, 실시일자, 화폐 등가(等價), 경비 부담 등급 등 4개 항목에 대해 주미공사를 통해 조선 정부에 문의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가 조선의 UPU 가입을 방해했다. 스위스 정부의 문서가 도착할 무렵 한반도는 청일전쟁이라는 전란에 휩싸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의 관리는 대부분 친일파로 구성돼 있어 일본의 눈치 보기에 바빴다. UPU 가입 문제는 자연히 흐지부지되었다. 1895년 6월 우편 업무가 재개되면서 UPU 가입 문제를 재론해야 했음에도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UPU 가입을 다시 추진했다. 이에 앞서 1896년 12월 주한미국공사 실(J. M. Sill)로부터 이듬해 5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UPU 총회에 참석하도록 권고 받은 바 있었다. 이에 따라 주미공사 이범진과 뒷날 통신원 참판이 된 민상호가 전권위원으로 워싱턴회의에 참가해 UPU의 개정 조약과 의정서 등에 서명했다. 워싱턴회의에 참가하기에 앞서 조선 정부는 스위스 정부의 문의 사항에 대한 답변서를 보내기로 하고, 국제우편 실시 일자를 1899년 1월 1일로 잡아 스위스 정부에 통보했다. 스위스 정부의 질문에 대한 답변서를 보내고 UPU 총회에서 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대한제국은 UPU 가입 절차를 사실상 마무리했다. 1897년 6월 스위스 정부가 회원국 외무부장관에게 그 사실을 통보함으로써 대한제국의 UPU 가입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다만 비준서 교환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주미공사 이범진이 UPU의 비준서 교환을 독촉하자, 대한제국 외부(外部)는 농상공부에 국제우편을 예정대로 실시할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농상공부는 1899년 1월 1일 예정대로 국제우편을 실시할 것이니 비준서를 교환하라고 통보했다. 외부는 1898년 7월 고종의 비준을 거쳐 비준서 정본을 워싱턴회의 개최국인 미국 정부로 보냈다.
을사5조약으로 UPU 회원 자격 상실
그것으로 UPU 회원국 자격을 완전히 따낸 것은 아니었다.
UPU 회원국이 되려면 국제우편을 실시해야 한다. 대한제국정부는 국제우편의 실시 시기를 1899년 1월로 잡고 프랑스인 클레망세를 우체교사로 채용해 국제우편 업무를 담당할 관원을 교육시키는 등 준비 작업을 꾸준히 해왔으나, 운송 수단인 선편이 마련되지 않아 국제우편 실시를 1년 연장했다. 문제가
된 우편물의 해외 체송은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에 맡기기로 하고, 1900년 1월 1일 국제우편 업무를 실시함으로써 우리나라도 UPU의 완전한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해 7월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된 UPU 창립 25주년 기념 임시총회에 스위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참석할 수 있었다.
그것이 대한제국 대표가 참석한, 마지막 UPU 총회였다. 6차 총회는 1904년 로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노일전쟁으로 연기되었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통신권과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므로 UPU 회원국 자격도 상실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최초로 가입한 국제기구와의 인연은 기구한 것이었다.
일본에 빼앗긴 UPU 회원 자격을 되찾은 것은 해방 후였다.
1947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UPU 12차 총회가 열렸다.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긴 했지만, 미군정의 통치를 받고있어 정식 회원국으로 참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총회에서 의미 있는 결정이 내려졌다. 한국과 같이 UPU에 이미 가입한 나라로서 한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국가에 대해 UPU 회원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인정한다고 결의했던 것이다. 그 같은 결정에 따라 한국은 1949년 12월 17일자로 소급해 주권국가로서 회원국 자격을 회복했음을 UPU 사무국으로부터 뒤늦게 통보받았다. 그때부터 한국은 UPU 회원국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