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전신전화국이냐, 우정전무국이냐, 체신국이냐
체신부는 1947년 1월 1일 일본식으로 된 우편국의 명칭을 일제히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예컨대, ‘경성’은 우리 고유의 이름인 ‘서울’로 고쳤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본정(本町)·황금정(黃金町)·병목정(竝木町)·연병정(鍊兵町) 등은 각각 충무로·을지로·쌍림동·남영동으로 고쳤다. ‘경성부’가 공식적으로 ‘서울시’가 되고 ‘정(町)’이 ‘동’으로 바뀐것이 1947년 8월이므로 체신부는 서울시보다 왜색 청산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때부터 사용했던‘우편국’이‘우체국’으로 바뀐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우편국’이라는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측은 엉뚱하게도 체신부 내에서도 전신전화 업무를 다루는 전무국사람들이었다. ‘우편국’하면 우편업무만 취급하는 관청이라는 인상을 풍기므로 전신전화 업무도 같이 취급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명칭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그들의 개정 논리였다. 교통부와 체신부를 통합하는 안에 적극 찬성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전기통신 분야의 직원들은 우체국 직원들과 같은 건물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서자 취급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급적 독립 건물을 세워 전신전화사업을 별도로 운영하려 했고, 우정사업과 분리하고 싶어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방체신국의 분리론이었다. 미군정시절 그들은 지방체신국을 분리해 전신전화사업만 다루는 지방전무국을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고 두 차례나 건의했으나,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만 일이 있었다. 아무튼 전무국의 주장에 따라‘우편국’의 명칭 개정 문제는 체신부 국장회의에서 거론되었다. 우편국을 대신할 이름으로 ‘우편전신전화국’‘우정전무국’‘체신국’3개 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어느 명칭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편전신전화국’이나‘우정전무국’은 사업 내용을 잘 표현하는 명칭이긴 하지만, 저금·보험·연금 등 부대사업을 카버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본부의 우정국이나 전무국의 명칭과 중복되는 느낌이 있어 갑론을박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신부차관 박용하가 우정국장 최재호를 불러 그 문제를 거론했다.
“우편국의 명칭을 어떻게 변경하느냐를 놓고 연구해 보았으나 적당한 명칭을 찾지 못했는데,‘ 우체국’이라 하면 어떻겠소?‘ 우체국’이라는 명칭은 지난 번 주요지 국장회의 때 대통령께서 ‘우체 사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신 유시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박용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최재호의 반응을 살폈다.
‘주요지 국장회의’란 1949년 3월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체신부 간부회의를 말한다. 그 날 회의에는 사무관 이상의 우체국장 등 전국 주요 간부 100여 명이 모였는데, 체신부가 중앙청 회의실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날 회의에서 이승만은“우체 사무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계가 깊으니 각자 임무 수행에 헌신 노력할 것이며, 우편국마다 영어 할 줄 아는 직원을 배치해 외국인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아무튼 우편국이라는 호칭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던 최재호는 우체국으로 개칭하자는 말에 선뜻 찬성하지 않았다. ‘우체사’라는 낱말은 구한국시대부터 사용했기에‘우체국’으로 개칭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구한국시대의 우체사는 우편 업무만 취급했다. 전신전화는 물론 보험·연금 등의 부대 업무도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우체국’으로 고친다 해도 개칭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최재호가 그렇게 설명하자, 박용하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지금 전무국에선 지방전무국을 설치하려다 실패해서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있는데, 이 일마저 좌절되면 실망이 클거예요. 이론이 어떻든 일제 때의 명칭을 버리고 구한국시대의 명칭으로 바꾸는 것은 무방할 테니, 우체국으로 개칭하도록 합시다. 전무국장은 이미 찬성했고, 다른 국장들도 별 이의가 없어요.”
상사인 박용하가 그처럼 사정조로 나오자, 소신파인 최재호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차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로 한 발 물러섰다.
‘우편’관련 용어, 모두 '우체'로 바꿨어야
‘우편국’이라는 명칭은 1949년 8월 그렇게‘우체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편국과 우체국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두 낱말이 풍기는 의미에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우편국을 우체국이라 부른다해서 전신전화사업을 같이 취급하는 관서라는 느낌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편국이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가 감정싸움에 집착하다 보니 도 대신 개를 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편국의 명칭을 우체국으로 고친 것은 왜색 청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일본에 강요당한 낱말을 버리고 구한국시대에 쓰던 용어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또 아쉬움이 남는다. 기왕 우체국으로 고칠 바에는‘우편’과 관련된 용어는 모두 ‘우체’로 바꿨어야 했다.
예를 들어, ‘우편사업’은 ‘우체사업’으로, ‘우편법’은 ‘우체법’으로, ‘우편엽서’는 ‘우체엽서’로 모두 고쳤어야 했음에도 달랑 우체국이라는 낱말만 고쳐 놓았으니, 절름발이 형태의 이상한 모양새가 돼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