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소리를 발견하다
‘Yesterday, I lost my lover never had it so good.~’ 잔잔하면서도 몽환적인 선율을 타고 흐르는, 소위 ‘소리 반 공기 반’의 목소리. 2007년 발매된 웅산 3집 수록곡 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심쿵’ 했더랬다. 어제 자신을 떠난 연인에 대한 애상을 읊조리듯 담담히 노래하는 것이, 고음으로 슬픔을 증폭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감수성을 ‘툭’하니 건든 것. 이미 우리나라 재즈계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웅산이었지만 당시 대중들에게 ‘웅산’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한 편이었다. 雄.山. 웅장한 산이라니. 더욱이 그 이름은 웅산의 음색과 용모와는 쉽사리 매칭이 되지 않았다. ‘웅산’이 18세에 충북 단양에 위치한 절, 구인사에서 얻은 법명(法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는 사람들은 인간 웅산에 대해 더욱 궁금해 하였다.
“다른 친구들이 국어, 영어, 수학과 씨름하며 입시를 준비하는 시기에 저는 산사에서 시간을 보냈지요. 그 시절 산이 좋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좋았고, 고요한 절에 은은하게 울리는 풍경소리가 좋았습니다.”
그 어떤 세상의 소음과 시름이 열여덟 소녀로 하여금 비구니가 되겠다고 마음먹도록 한 것일까. “특별한 사연과 슬픔이 있어서 절에 들어간 것은 아니에요. 집안의 종교가 불교였고 어렸을 때부터 절이라는 공간과 명상이라는 수련은 저에게 정말 익숙한 것이었죠. 또래보다 조금 일찍 제 길을 찾아 나선 것뿐이었습니다.”
기꺼이 부처의 길을 따르기로 했었지만 수행 중 맞이한 특별한 경험은 그녀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게 된다. 하루 반나절 이상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면서 자신 안의 ‘음악’이라는 거대한 열정과 잠재력을 일깨우게 된 것.
“알 수 없는 선율이 마음속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왔어요. 그 소리들이 점점 커지고 많아져 더 이상 내 안에 담아놓기가 힘들 정도였죠.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외우는 기도시간에도 그 단어에 음이 실렸고 주위 사람들 또한 그 소리 듣기를 즐겨 했습니다.”
재즈라는 화두를 품기까지
음악에 대한 열망이 맹목적이었던 만큼 결단도 빨랐다. 불교공부를 위해 무작정 올랐던 산을 1년 반 만에 내려왔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해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이 그녀가 계획한 가수가 되는 길이었다. 계획은 순조롭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대학에 입학해 록밴드 동아리를 찾았고 밴드창단 이래 최초의 여성 리드보컬이란 타이틀을 쥐게 되었다. 대학가요제 지역예선에서 가창상과 인기상도 받았다. 매일같이 한 곡 한 곡을 수십 번씩 불러가며 밤새워 노래연습을 했단다. 록 음악에 푹 빠져 살았을 때다. 산사에서 수행했던 복식호흡 덕분인지 그 시절 웅산의 목소리는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힘 있고 커, 소리만 듣고는 남자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대학시절 록음악은 내 인생의 전부였어요. 록 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내게 한 친구가 다른 장르의 음악도 접해보라며 녹음테이프를 건넸습니다. 받은 후 무심코 책상 서랍에 넣어뒀는데, 청소를 하다가 발견하고 그 음악을 틀었어요. 순간 세상이 멈춰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여인의 애절한 노랫소리에 가슴이 저려왔어요.”
그 음악은 다름 아닌 ‘빌리 홀리데이’의 . 듣는 순간 저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재즈는 웅산 인생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 노래로 자신을 문책하듯 부르고 또 불렀다. 입시생처럼 밤새 노래를 외우고 화성학을 공부했다. 재즈클럽을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기도 성남에 있는 ‘음악마당’이란 재즈클럽에서 웅산은 운명처럼 류복성, 신관웅이라는 한국 재즈 1세대 기수를 만났다. 웅산에 매료된 이들의 응원과 함께, 드디어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웅산의 삶이 시작되었다.
대중의 마음을 뒤흔든 울림
1996년 1월. 웅산은 홍대 재즈클럽 ‘써티(thirty)’에서 데뷔무대를 치른다. 그 후 대학로의 재즈바 ‘천년동안도’, 청담동의 재즈바 ‘원스인어블루문(Once in a Blue Moon)’ 등 클럽에서 수많은 공연을 펼치며 차근차근 내공을 쌓아 올렸다.
“클럽은 제 음악에 뿌리가 되어 준 곳이죠. 매일같이 무대에 섰는데, 다음날 서게 될 무대를 위해 늘 새로운 곡을 연습하고 카피했죠. 지금은 없어진 곳이 많은데 상당히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에 재즈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웅산은 1998년 일본으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500회가 넘는 공연과 1년에 4차례 전국 투어를 가질 정도로 일본에서의 그녀의 인기 또한 짐작할 만하다. 2003년 한, 일 동시 발매로 화제가 되었던 첫 앨범에서는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 베니 그린, 로니 플렉시코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멋진 앙상블을 만들어내어 다시금 그녀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2005년 2집 앨범 는 우리나라 음악계가 시도하지 못했던 온전한 블루스 앨범이라는 평단의 극찬과 함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역량도 아낌없이 펼쳐 보인다. 2007년 3집 앨범 를 발매하며 구성에서부터 연주, 노래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부분도 부족하거나 아쉬움이 없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으면서 그녀만의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내어, ‘재즈 스타일리스트’라는 칭호를 부여 받는다. 그리고 2008년 7월, 일본전국 투어 일정을 가진 웅산은 ‘재즈 슈퍼 익스프레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일본 최고의 뮤지션과 함께 재즈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블루노트’에 초청받아 한국 뮤지션 최초로 공연했다.
재즈를 통해 나를 찾아가다
웅산의 공연을 접한다면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지기 마련이다. ‘재즈 스타일리스트’ 라는 칭호에 걸맞게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그 어떤 장르의 곡이라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특하게 소화해낸다.
“재즈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고 생각해요. 록이든 블루스든 R&B든 모든 음악을 품고 있어서 그 매력이 더 크지 않을까 싶어요. 이를 테면 ‘어머나’라는 트로트 곡에 재즈의 옷을 입혀 스윙리듬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기까지, 재즈의 길을 걷는 것이 웅산에게는 불교에서의 수행과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또 새로운 시도를 위한 도전이었다. 매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1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1~2시간씩을 걸으며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10년 동안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재즈를 만나고선 ‘이게 나의 수행이구나’라고 알게 됐어요. 재즈는 평생 공부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해요. 공부해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으니까. 스윙의 느낌을 깨닫는 데만도 3년이 걸렸어요. 웅산 하면 ‘편하게 부르기’를 많이 떠올리는데, 그렇게 편안하게 부르기까지 10년 넘게 걸렸죠. 리듬을 정확히 읽고 그 리듬에 올라탈 줄 알아야 비로소 듣는 이가 편안함을 느끼거든요. 치열하게 공부하며 부를 수밖에 없죠.”
재즈라는 음악으로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웅산. “인생에서 재즈를 몰라도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재즈를 알게 된다면 그 치명적인 매력이 삶에 큰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해요.” 재즈 입문자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재즈가 마냥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영화 속 음악을 찾아보라는 것. 각기 다른 리듬과 선율로 수없이 변주하는 재즈의 매력에 퐁당 빠질 것이란다. 올 여름 웅산의 새로운 도약이 시작된다. 활동 반경을 넓혀 중국에 진출할 예정이며 8월에는 한국, 일본, 중국에 11번째 앨범이 동시에 발매된다. 새로운 앨범은 미국 그래미상 수상자들의 곡들로 채워진다. 웅산이 새롭게 해석한 곡들이 또 한 번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