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사랑한 수의사, 행동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되다
술 취한 주인이 잘못될까봐 쉼 없이 자기 몸에 물을 적셔 뒹굴고는, 결국 제 목숨은 잃고 주인만 구해냈다는 충견 설화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오수의 견’ 이야기만 봐도 우리 민족이 동물, 그중에서도 개와 얼마나 각별한 사이인지 알 수 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유독 ‘가족’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5월. <우체국과 사람들>이라는 제호에 걸맞게 ‘사람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수의사 설채현 원장을 찾았다. 각종 매체를 통해 낯익은 유명인을 만나기란 어려울 것 같았는데, 그는 걱정이 무색하게 일정을 조정해가며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동물병원으로 취재진을 초대했다.
“여기저기 얼굴 비추고 새 프로그램 MC도 맡게 됐지만, 동물행동학을 알릴 수만 있다면 최대한 제 목소리를 내보려 합니다. 동물행동학 전문가 공인 자격을 갖춘 국내 1호 수의사로서, 풍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행동학적 지식을 전파하는 건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설채현 원장은 미국의 유명한 동물 훈련사 양성기관인 KPA (Karen Pryor Academy)에서 클리커 트레이너 자격을 얻은 국내 유일한 수의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설립자 ‘카렌 프라이어’가 고래를 클리커(clicker)로 훈련하면 잘 따라온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반려동물에게 확대·적용하면서 설립된 기관이다. 동물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시키는 것만 강요하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훈련사’라는 말보다 ‘트레이너’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는 설 원장. 수의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동물행동학을 공부하기까지 정말 힘들었다는 그에게서 고난과 열정이 함께 일으키는 놀라운 시너지가 엿보인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동물에 열광하는, ‘선천적 동물 애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저희 어머니는 반려동물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며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그러다 제가 학교 끝나고도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네만 골라서 다니느라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어머니는 살짝 포기하신 듯 제안을 하셨습니다. ‘1등 하면 강아지 키우는 거 허락할게’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그 약속을 꼭 이루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항상은 아니었지만 자주 1등을 했는데 속았죠, 뭐. 하지만 그때부터 고교 6학기 내내 장래희망을 ‘수의사’로 써서 냈고, 마음속에도 어느새 다른 꿈은 들어올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진학한 수의대에서 설 원장은 마음껏 동물들을 만나고 교감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지금은 배우자로, 당시엔 연인으로서 교제했던 여자친구의 강아지가 처음에는 설 원장을 잘 따랐지만, 서열을 가르치며 혼내는 교육을 적용하니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 그때부터 선진국의 반려동물 훈련 사례를 찾아보며 행동학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결국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동물행동학 전문가‘라는 자격을 갖췄다.
개물림 사고가 생기면 상처에 따른 단계별 조치가 필요
유명 연예인이 키우던 반려견이 사람을 물어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는 극단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이후 견주와 반려견을 향한 시선이 매우 곱지 않았고 당시 반려견과 산책하던 한 견주가 단지 입마개를 안 채웠다는 이유만으로 행인에게 폭행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설 원장은 수의사로서 안타까운 사례들을 더욱 많이 접하고 있다며 개물림 사고에 대한 소견을 전했다.
“개물림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일어난 뒤 반려견을 직접 데리고 와서 상담을 요청하시는 분이 급증했습니다. 그동안 안전장치 없이 반려동물과 나오거나 대소변을 치우지 않던 일부 견주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사실 모 가수의 개도 현관 앞에서 사람을 물었듯이 개물림 사고는 산책할 땐 거의 일어나지 않고, 사고 피해자는 대부분 보호자(견주)나 얼굴이 친숙한 주변인일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개물림 사고의 잠재적 가해자라고 바라보는 선입견은 사라졌으면 합니다.” 최악의 개물림 사고 이후 반려동물 인구가 지나치게 죄책감을 갖고 사는 것 같아 마음이아프다는 설 원장은 사고의 원인이 된 개는 무조건적으로 ‘안락사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할 수 없단다.
“선진국에서는 개물림 사고의 상처에 따라 1~6단계를 적용하여 판단합니다. 제가 다녔던 KPA에서도 1년에 한두 마리가 안락사 당하는 걸로 아는데, 저 역시 안락사를 전적으로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해당 개가 과학적으로 재활이 가능한지 충분히 판단해봐야 하고, 인간과 격리돼야 하거나 입마개를 24시간 채워야 한다면 그땐 안락사를 고려해볼 수도 있어요.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니 개를 위해서라도 이 방법을 권고하는데, 미국에서는 이것도 분야별 전문의의 소견이 꼭 필요한 조치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개물림 사고의 예방책과 사후 대처를 고려할 때, 오로지 인간의 편리만 추구해온 것은 아닐까? 물론 극단적인 결과(피해자가 사망했거나 돌이킬 수 없는 영구 장애를 입은 경우)가 발생했다면 5~6단계에 해당하여 안락사가 권고된다. 하지만 선진국처럼 전문가의 주도로 꼼꼼한 검토가 뒷받침된다면 납득할 만한 조치가 따를 테니 논쟁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개는 개일 뿐, 절대로 사람이 아니랍니다
여러 동물 중에서도 강아지와 특히 친숙한 설채현 원장은 사람들에게 종종 “제가 개를 키워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1인 가구에서 강아지가 너무 장시간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면 저는 좀 더 상황이 개선된 후에 키우거나 어느 정도 비용을 감수하고 ‘강아지 유치원’에 보내면서 키우실 것을 권하고 있어요. 강아지가 홀로 있는 시간이 길면 두려움이 생기고 심한 경우 우울증을 앓기도 하니까요. 이미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 상태에서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면 굳이 아이 때문에 강아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강아지의 신호를 읽지 못 해서 개물림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하고 견주께서 공부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 외에 강아지 털뭉치가 목에 쌓여 사고가 생긴다는 둥의 이야기는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강아지 털은 그렇게 뭉치지도 않고 기도로 흡입되기 전 인체의 코털 정도에서 걸러지므로 걱정하지 마세요.” 1시간 가까이 행동학적 이론에 비춰 동물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설채현 원장을 보며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신호를 읽고, 읽는 만큼 더 많은 것이 행동으로 보인다는 설 원장은 끝으로 ‘개는 개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개를 가족처럼 여기는 건 좋지만 사람이 아니란 걸 항상 기억하세요. 기껏해야 사람의 2.5~3세에 불과한 지능을 가진 개한테 체벌과 서열이론을 적용하는 건 교육적 효과가 낮습니다. 그 또래 아이에겐 말보다 바람직한 행동을 보여주는 게 효과적인 것처럼 개도 그렇게 대해주세요. 개를 의인화하지만 않아도 사람과 동물이 모두 행복한 반려동물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Profile
2018년
• 대화가 필요한 개냥(tvN),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EBS) 출연
2017년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애완동물계열 겸임교수
• 개밥 주는 남자(채널A), TV동물농장(SBS), 하하랜드(MBC) 출연
2015년
• '그녀의 동물병원' 원장
• 한국인 수의사 최초 KPA 인증 클리커 트레이너 자격 획득
• UC데이비스, 미네소타대학교 동물행동학 익스턴십 수료
• 미국 캘리포니아주 수의사회, 미국 동물행동 수의사회 정회원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 공중방역수의사
2010년
•건국대학교 수의과대학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