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를 꿈꾸던 제작자
겨울비가 내리는 오후. 연구소 2층 작업실에서 해금 울림통을 다듬는 김성훈 씨의 모습이 보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울림통을 고정시키고 있는 성훈 씨의 오른손을 아스라이 빗겨 지난다. 아찔한 순간이다. 몇 번의 칼질이 이어지자 울림판은 어느새 울림통과 하나가 되었다. 웃을 땐 천진한 어린아이 같다가도 작업에 몰두할 땐 눈빛이 매서워지는 성훈 씨다. 작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수도 있기 때문에 신경을 모으다 보면 표정이 없어진단다. 성훈 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권유로 가야금 연주를 배웠다. 연주자의 꿈을 키우다가 사정이 생겨 악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
“가야금을 연주할 때는 적성에도 맞고 좋았어요. 나름 흥미를 갖고 배우는 과정에 있었는데 집안사정이 생겨 계속 할 수 없었어요. 아쉽기는 했지만 내 길이 아닌가 생각했고 다시 일상의 학업에 열중했어요. 그렇게 가야금과의 인연은 끝났다 여겼죠.”
문학도의 결심
가야금 연주자의 꿈을 포기하고 결국은 영문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한 성훈 씨는 전공에 대한 흥미가 많지 않았다. 문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국악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고 결국 인간문화재 악기장 고흥곤① 선생의 연구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악기제작을 배웠다. 그러다 군입대를 하게 되었고 군대에서 보낸 2년 여의 시간동안 국악기를 만들자는 결심 후, 더 이상 다른 길에 미련이 없었고 제대 후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고흥곤 국악기연구소를 찾아 악기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다.
“제가 가야할 길이라는 확신이 왔어요. 손재주가 있어서 무언가 깎고 붙여서 만드는 걸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어요. 돈이나 출세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었고요. 오로지 제가 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신념에 따르기로 한 것이죠.”
학업을 포기한다는 자식의 말에 아들의 선택을 믿고 지지하고 응원해 준 부모님이 있었다.
“가족의 지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수도 있죠. 집중해서 배워야하는 때에 다른 갈등을 풀어야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성훈 씨는 고흥곤 선생에게 노력을 인정받아 문화재청에 장학생으로 추천을 받고 5년간 전수를 받으며 본격적인 장인의 꿈에 한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5년의 장학생 기간이 끝나고 다시 5년, 10년을 배우고 또 만들고 나니 이수자라는 타이틀이 붙었죠. 아직 멀었지만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오르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 잡고 악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면 오랜 시간일 수 있지만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해요. 뒤돌아보지 않고 꾸준히 가볼 생각입니다.”
상처는 소리에 아물다
얼마 전 성훈 씨는 칼에 손을 베어 크게 다친 경험이 있었다. 깊게 베어서 출혈도 많았고 없던 두려움도 갖게 됐다. 단 하나의 길. 하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에 대한 불안함이 엄습해 온 순간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다른 길에 대한 생각들로 잠시 갈등을 겪었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고쳐 잡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해금이나 가야금 등 악기를 만드는 작업은 겉으로 보이는 형태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소리로 완성 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든 점도 있어요. 판소리하시는 분들이 득음을 하는 과정이 너무나 큰 고통의 과정을 지나야 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악기의 소릴 찾는 과정도 쉽지 않은 길이죠. 그 긴 과정을 묵묵히 가다가 예상치 못한 걸림돌을 만나게 된거죠. 마라토너가 예상치 못하게 넘어지면 페이스를 잃듯이 저 또한 그런 상황을 겪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페이스를 찾았어요. 고마운 일이죠.”
은근과 끈기로
인간문화재 악기장 이수자 김성훈. 하나의 길을 택하고 은근과 끈기로 묵묵히 걸어온 그를 우리는 이렇게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늘 무엇을 놓고 무엇을 취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성공한 만큼 실패도 맛본다. 성훈 씨가 지금까지 악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한 길을 걷고 있고 또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있는 고흥곤 국악기연구소에는 함께 일하는 분들이 많아요. 문화재청에서 지원을 받는 장학생부터 저와 같은 이수자도 10명이나 있고요. 조교의 자리까지 가려면 저 또한 스스로도 노력을 게을리 할 수가 없죠. 장인이 된다는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에요. 장인 밑에서 배우고 있지만 결코 가깝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처럼 은근히 또 성실한 자세로 꿈에 가까이 가려합니다.” 하나의 해금을 또 한 대의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 한 사람의 손만을 거치는 게 아니다. 명주실을 꼬는 것부터 울림판을 붙이고 다듬는 과정까지 공방의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결국은 장인의 눈과 귀 손끝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물론 온전히 하나의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지만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 생산하는 악기들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 성훈씨도 처음으로 만들었던 악기들을 떠올린다. 연습생들이 쓰는 해금이었는데 그때의 감동은 여전히 그를 밀어주는 힘이 된다. 이젠 그가 만든 악기가 연주회에서 연주자의 손을 거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니 어쩌면 어린 시절 연주자의 꿈을 대신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악기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신념과 끈기를 보면 언젠가 장인의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날을 기다린다.
① 1997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국악기의 복원과 제작 그리고 전수교육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