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囊中之錐)
봄바람이 부는 오후, 서울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내 침선장 공방에서 이수자 박영애 씨를 만났다.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문이었지만 문을 열기 전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바느질에 몰입하고 있었다. 바느질 이야기를 꺼내자 친정어머니와의 추억을 들려준다. 어릴 적 어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을 자주 하셨는데, 솜씨는 물론이고 바느질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단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박영애 씨도 일찍이 바느질에 빼어난 소질을 보였다. 학창시절부터 여동생에게 직접 옷을 만들어 입힐 정도였다. 가정시간에 만든 치마저고리는 세탁소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여전히 빛나 패션디자인을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여동생의 비싼 의상을 볼 때면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녀가 전통복식 만들기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과 만남
모두가 잘 알고 있는 ‘Education’은 라틴어
‘Educatio’에서 온 말로 ‘꺼내다’는 의미이다.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우리 교육 풍토지만 그 어원에 의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꺼내는 것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자가 가진 재능을 꺼낼 수 있도록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박영애 씨는 그와 같은 두 명의 스승을 만나 바느질이라는 재능을 세상에 꺼낼 수 있었다.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고(故) 정정완 선생과 그의 며느리이자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보유자인 구혜자 선생이다.
박영애 씨는 바느질을 향한 진지함이 취미 수준을 넘어서자 본격적으로 침선을 배워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처음 찾아간 곳이 전통공예예술학교였다. 그곳에는 그녀가 꼭 모시고 싶은 스승인 故정정완 침선장이 계셨다.
“바느질 장인이신 정정완 스승님은 위당 정인보선생의 맏딸이기도 하셔서 선비가문에서 자라며몸에 밴 위엄과 기품을 제가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처음 박영애 씨를 본 스승은 20대의 어린 나이에 바느질을 배우러 온 그녀가 놀랐고 기특했다고. 그리고 누구보다 바느질에 진지한 자세를 보이는 제자를 아껴 바느질을 가르쳤고 끊임없는 칭찬으로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잘하지 못했을 때도 타박보다 칭찬을 해주신 스승의 교육방식이 바느질에 열의를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입문한 지 2년이 되던 해, 스승의 권유로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한 남자아이 돌복이 입선의 쾌거를 이루었다. 그 후 출품하는 작품마다 입선의 영광을 누리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취미로 시작한 바느질이 어느덧 전문가가 인정하는 실력이 된 것이다.
그리고 故정정완 스승과의 인연은 그의 며느리 구혜자 침선장에게로 이어졌다. 출산 후 육아에 많은 시간을 쏟을 무렵, 다시 본격적인 한복 작업으로 이끈 주인공도 구혜자 침선장이었다.
“어느 날 구혜자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공방에 나와서 함께 한복 작업을 해보지않겠느냐는 제안이었죠. 아이들이 많이 자라서한복 작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구혜자스승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잊어버렸던 바느질을다시 배우고 바느질에 대한 열의를 다시 한번 키울 수 있었죠. 저에게는 두 분 모두 큰스승님이십니다.”
격려와 즐거움으로
박영애 씨가 한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친숙함과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시던 한복을 입고 자랐기에 한복이 자연스러웠고, 한국무용을 전공한 동생의 공연을 볼 때면 한복의 선과 색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한복 공예인의 길은 그녀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진솔옷을 만질 때 비단의 사각거리는 소리는 늘 저를 설레게 해요. 남편과 아이가 잠든 후 밤새하던 작업이 어느새 동이 튼 아침을 맞이할 때는 고단함이 아닌 희열을 느껴요. 특히 오랜 시간 작업 끝에 완성된 옷을 볼 때의 만족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이 제가 만든 옷을 입었을 때 뿌듯함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박영애 씨에게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어머니로서 한복 공예인의 길을 가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격려와 도움은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남편의 외조는 그녀가 한복 공예인의 길을 갈 수 있었던 힘이었다. 가사와 육아에서의 도움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작업 뒤에는 손수 자가용으로 배웅하며 그녀의 도전을 묵묵히 지원한 사람도 남편이었다.
종교와 같은 바느질
그녀에게 바느질은 종교와 같다. 법당에 앉아 참선할 때 이르는 평안함을 바느질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승무를 추는 장인이 해탈에 이르는 것과 같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할 때면 일상에서 오는 고뇌와 상념도 비로소 사라진다. 온몸의 신경이 바늘 끝에 이르고 옷감을 관통해 만들어 내는 한복의 아름다운 선은, 상념과 번뇌를 잊게 한다. 그런 그녀에게 목표보다 과정에 충실하고 싶다는 향후 계획은 너무나도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누구나 목표가 있듯이 저에게도 목표가 있어요.하지만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보다는현실에 충실하고 싶어요. 제가 만든 한복을누군가 입고, 행복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거죠.”
끝으로 박영애 씨는 한복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져주기를 당부했다. 최근 기능성을 더한 계량한복이 전통한복의 원형을 벗어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시대의 흐름일 뿐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한복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점임을 강조했다. 박영애 씨의 바람처럼 우리 한복에 대한 많은 관심이 끊이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