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을 만나다
중요무형문화재 53호 채상장 보유자 서신정 씨. 한평생 대나무와 함께 한 중요무형문화재 서한규 선생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이자, 가장 엄격한 스승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 하나예요. 대나무를 쪼개고, 쪼갠 댓살을 엮고…. 몸은 몸대로 고되고 그렇다고 크게 돈벌이가 되는 일도 아닌지라, 몇 번이고 대를 손에서 놓으셨죠. 온통 대나무 천지인 담양을 떠나야 이 일하고 연을 끊을 수 있다며 다른 지역으로 이사도 해보고, 직장에 취업도 해보고. 대나무와의 연을 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셨는데,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은 이곳이었어요. 아버지에겐 대나무가 숙명이고, 이 일이 천직이셨던 게죠.”
평생을 대나무와 함께한 아버지의 삶.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고된 삶인지 알았기에 서신정 씨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일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채상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20살이 되던 해. 늦은 가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다니던 직장을 다니다 몸이 안 좋아서 잠시 집에 내려와 있을 때였죠. 가을임에도 한낮에는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는데, 툇마루에 앉아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댓살을 짜고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게 됐죠. 어려서부터 보던 모습인데, 그날따라 그 뒷모습이 왜 그리 짠하게 느껴지던지. 원래 채상은 남녀가 2인1조로 하는 일이거든요. 남자는 대나무를 베고 얇게 갈라서 대오리를 만들고, 여자는 그 대오리를 짜는 일을 하고.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을 혼자 해오셨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쉬는 동안이라도 아버지를 좀 도와드리자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죠.”
채상, 숙명이 되다
담양에서 나는 3~4년생 겨울 대나무 중에서도 질 좋은 것만을 골라 우리네 조상들이 그러했듯 정성스런 손길과 올곧은 마음으로 한 올 한 올 엮는 채상장의 삶. 한평생 그 길을 걸어온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녀 역시 30년째 오롯이 이 길을 걷고 있다. 매일 새벽 6시, 대오리를 염색하는 것으로 그녀의 하루는 시작된다. 채취한 대나무를 겉대와 속대로 분리해 0.5cm 정도로 얇게 쪼갠 다음 입으로 겉껍질과 속껍질을 갈라내어 만든 대오리. 실처럼 얇고 부드러운 대오리에 천연의 색을 입히는 일은 매일 반복되는 과정임에도 늘 새롭다.
“자연의 색이 늘 변하듯, 자연에서 얻은 천연염료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물과 섞는 비율과 끓이는 온도와 시간 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색깔이 나오거든요.”
전통적인 네 가지 색만을 사용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자연의 다양한 색채를 대오리에 물들인 덕분에 서신정 씨의 채상은 더 다양한 빛깔을 갖게 되었다. 노란 나비가 날아들 것 같은 치자열매, 새봄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쑥, 첫사랑 누나를 닮은 붉은 다목. 자연의 빛깔로 물든 대나무를 짜는 일은 인내심과 체력, 기술을 고루 요하는 고된 일이다.
“그냥 대나무를 엮는 것이 아니라 수를 놓듯이 대나무를 짜는 거예요. 오로지 수작업만으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거죠. 처음 제가 채상을 배울 때는 사용되는 무늬가 몇 가지 없었어요. 그게 늘 안타까웠죠. 왜 좀 더 아름답고 다양한 무늬를 만들 수 없을까. 그때 만난 분이 이종석 선생님이셨어요. 채상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는데, 젊은 사람이 채상을 배우는 것이 기특했는지 문헌 하나를 주셨어요. 채상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는데, 예전에는 채상에 다양한 문양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었죠.”
좀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들을 채상에 새겨 넣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 눈에 띈 것이 외할머니께서 시집올 때 가져오신 채상 바구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민자 연속무늬로 만든 채상이었다. 서신정 씨는 3일 밤을 꼬박 새면서 도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도안을 바탕으로 채상 짜는 과정을 반복하기를 수십 번. 마침내 민자 연속무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채상은 어느 것 하나도 인위적인 것이 없다. 자연에서 나는 것과 사람의 손을 일일이 거쳐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서신정 씨는 조금 더디더라도 스승이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에서 나는 것을 가지고 우리의 전통 채상을 지켜가고 있다.
채상의 부활을 꿈꾸다
어느새 그녀에게도 채상은 숙명이자 천직이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열흘을 꼬박 매달려야 삼합 제품을 간신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쭈그리고 앉아서 대를 쪼개고 대오리를 짜야 하는 고된 노동이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격이 고가일 수밖에 없어요. 공장에서 하루에 몇천 개씩 찍어내는 상품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채상을 찾는 사람들이 없어졌고,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어느새 채상은 제게 ‘일’이 아닌 반드시 전승해야 할 ‘숙명’이 되어 있었죠.”
서신정씨는 채상의 전통적인 기법에 현대적 멋을 더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면서 채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민자 연속무늬 복원을 시작으로, 우리 전통 문양 10가지를 복원했고 20개가 넘는 현대적 문양을 새로 만들었다. 채상을 활용한 가방, 장신구, 안경집 등 각종 생활용품부터 한편의 그림 같은 채상 작품까지, 그녀의 도전은 끝이 없다.
어린 시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걷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딸은, 어느새 아버지와 꼭 닮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번도 “잘했다” 칭찬하는 법이 없었던 아버지는 2012년 딸이 무형문화재 채상장 보유자로 인정받았을 때, 처음으로 눈물을 글썽이셨다. 오래전 아버지가 무형문화재에 이름을 올리던 날, 펑펑 울며 기뻐했던 딸처럼 말이다.
“채상은 그 결이 어찌나 고운지 다산 정약용은 무늬 ‘채(彩)’ 자 대신 비단 ‘채(綵)’ 자를 붙여 채상(綵箱) 곧 ‘비단 같은 상자’라고 부르기도 했죠. 통풍이 잘되어 곰팡이가 생기지 않고 냄새도 배지 않아, 임금님께 귀한 물품을 진상할 때, 혼수를 담아갈 때 채상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뛰어난 기술과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 죽세공예품의 정수가 바로 채상입니다.”
매일 수천 개의 그릇이 공장에서 찍어져 나오는 요즘. 직접 대나무를 베고 입으로 벗겨 내 일일이 손으로 짜서 만들어 내는 작업, 더구나 오롯이 일주일을 쏟아 부어야 겨우 작품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채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그 치열하고 고된 일상에 지칠 때면 그녀는 언제나 대나무 숲을 찾는다. 대나무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 바람을 타고 흐르는 대나무 향기가 주는 편안함 속에서 분주한 마음과 욕심을 쏟아내고, “채상은 시집보내는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올 한 올 짜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채워 넣는다. 30년 채상장의 삶은 그렇게 오늘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