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티마을에서 광명으로
박형박 이수자는 아버지이자 스승인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보유자 박창영 선생에 이어 5대째 갓일을 하고 있다. 박형박 이수자를 만나기 전 이수자가 갓일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갓일을 시작한 이유가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인지, 전통복식을 전공한 학생으로서 적성을 발휘하는 것인지. 박형박 이수자는 그 물음에 “자연스럽게” 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갓일 하는 것을 봐왔고, 갓일이 가업인 것을 알았기에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심지어 주변에서도 당연히 그가 가업을 잇게 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주변의 믿음과는 달리 아버지는 아들의 갓일을 만류했다.
“혼자 작업하시는 아버지를 도와 갓일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작업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셨어요. 불 앞에서 작업을 해야 하기에 위험하고, 종일 바닥에 앉아 집중해야 하는 고단함 때문이었죠. 찬물이나 떠다드리고 심부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 육체적으로 장성하고, 전통복식을 전공해 이론까지 갖추게
되자 아들의 가업계승 의지를 인정하고 본격적으로 갓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렇게 경상북도 예천 돌티마을에서 시작된 가업은 아들의 작업장이 있는 광명시로 옮겨와 5대째를 이어가게 되었다.
옛것과 새것
현재 박형박 씨가 하는 일은 두 가지다. 옛것을 복원하는 일과 새것을 만드는 일이다. 새것을 만드는 일은 대나무를 다듬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갓을 말총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갓의 90%는 대나무로 만든다. 단단한 대나무를 잘게 갈라서 뜨거운 물에 삶아 부드럽게 만들고 손으로 훑어내면 갓의 주재료인 대나무 실, 세죽사(細竹絲)가 만들어진다. 머리카락보다 얇은 세죽사를 하나하나 엮어 갓의 태인 양태①를 만들고, 말총을 엮어 총모자②를 완성한다. 그리고 총모자와 양태를 인두질과 아교칠, 먹칠, 옻칠을 반복하는 입자과정을 거치고서야 하나의 갓이 완성된다. 이 모든 과정이 박형박 이수자의 손을 거친다. 사실 갓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 양태일과 총모자일 그리고 입자일을 나누어서 하는 분업작업이다.
그러나 현재 갓일을 나누어 할 만한 전문 인력이 없어 박형박 씨가 모든 과정을 홀로 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함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쉽지 않지만 박형박 씨는 불 앞에서 하는 입자 작업을 갓일 중 가장 힘든 일로 꼽는다. 요즘처럼 뜨거운 여름 날씨에 전기화로의 열을 인두에 담아 갓을 만드는 작업은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다고. 그러나 더욱 힘든 일은 바로 옛것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복원작업은 훼손된 부분을 복원해서 새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옛 갓과 동일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복원한 부분이 새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고 나머지와 조화롭게 어울려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복원작업의 포인트다. 때문에 옛 갓에 사용된 제작기술이며 사용된 재료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박형박 씨는 전통의상학으로 학사와 석사, 현재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갓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쌓았기 때문에 이런 복원작업도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16세기 말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약포 정탁(1526~1605)이 쓰던 갓을 재현한 작품이다. 아버지 박창영 선생과 함께 작업하면서 복원과정을 세세히 남겨 약포 정탁 갓에 사용된 제작기술의 이론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제35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약포 정탁 갓을 출품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때를 갓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으로 꼽을 정도로 박형박 이수자에게 복원작업의 의미는 남다르다. 지금도 박형박 이수자는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서 복원작업 및 보전처리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박형박 씨는 2012년에 코엑스에서 열린 전통공예품미래전에 디자이너 임태희 씨와 협업으로 ‘어른어른 그림자’라는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전통의 복원과 함께 현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해석으로 전통을 알리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불 앞에서 종일 집중해야 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박형박 이수자가 갓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전통을 잘 복원하고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박형박 씨가 힘든 복원작업에 집중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사라지는 전통을 실천적으로 이어가기 위함이다. 이론으로만 이어지는 제작 기술은 박형박 씨의 복원작업으로 실제가 된다. 그리고 복원작업으로 터득한 제작기술은 새 갓을 만드는데도 녹아든다. 그렇게 전통 갓의 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저에게 갓은 단순한 생계가 아닌 사라지는 전통공예를 잇는 자부심입니다. 이론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재현함으로써 과거에 사용된 제작 기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복원작업을 하면서 익힌 제작 기술들이 새로운 갓을 만드는데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이수자에게 갓은 단순히 잘 만들어야 하는 공예품이 아닌 옛 선비의 정신과 멋을 담고 있는 전통이다. 그래서 전시회에 작품을 선보일 때면 갓을 쓰는 방법이나, 사람들이 갓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고정관념들까지 바로 잡아준다. 가령 갓은 모자와 달리 머리에 푹 눌러쓰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얹는 것이라거나, 단순히 햇빛을 막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패션으로 멋을 내기 위해 갓을 썼다는 것이다. 옛것으로 새것을 이어간다는 의미인 온고지신(溫故知新). 박형박 이수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단단한 대나무를 실처럼 만들었다하여 세죽사.
머리카락보다 가는 세죽사를 하나하나 엮어가며 갓을 만든다.
스승과 제자
갓에 대한 박형박 이수자의 생각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갓으로 선비의 정신을 탐구한다”는 아버지로부터 갓일을 배우면서 갓에 대한 남다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갓일을 배웠기 때문에 편하게 갓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이라면 묻기 어려운 작은 것들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언제든 묻고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그리고 생활을 같이하기에 갓일에서 손을 놓지 않고 집중력 있게 갓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아버지 덕분에 마음 편히 작업할 수 있었고, 이제 아버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박형박 이수자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딸의 스승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다.
“가족이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계승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해요. 특히 갓일은 배우는 데만 1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하기에 타인보다는 동고동락하며 함께 오랫동안 작업할 수 있는 가족이 계승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포부를 묻자 훌륭한 스승이 되기 위해 제자로서 아버지에게 받을 가르침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또 지금처럼 복원작업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전시회를 통해 우리 갓과 그 정신까지 알리는 것이 그의 목표란다. 그 바람처럼 갓이 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계속해서 후세에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각주
① 갓모자의 밑 둘레 밖으로 둥글넓적하게 된 부분
②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으로 만든 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