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제가 할게요
“각자란 말 그대로 나무에 글을 새겨 넣는 일입니다. 용도에 맞는 좋은 나무를 고르는 ‘치목’, 나무를 건조시켜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다듬은 후 그 위에 글씨를 균형 있게 늘어놓는 ‘배자’, 그리고 칼과 끌, 망치를 이용해 글자를 새겨 넣는 ‘각자’. 이 모든 일이 각자장이 능숙하게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모습에서 장인의 기운이 느껴진다. 운천 씨의 꿈은 교사였다. 꿈을 위해 사범대에 진학했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기간제 교사로 교단에 서기도 했다. 2005년 운천 씨가 ‘교사’의 길 대신 ‘각자장’의 길을 택했던 건, 순전히 아버지께서 흘리듯 던지신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운천아, 너 각자 일 안 해볼래?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꼬박 한자리에 앉아서 나무에 글자를 새기던 아버지. 그렇게 한평생을 성실한 ‘각자장’으로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넉넉한 삶을 누리지 못했던 아버지를 보며 절대 아버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아들은 단호하게 “저는 각자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서운함을 표현하지도, 더 이상 당신의 삶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자꾸 운천 씨의 귓가에, 마음에 맴돌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큰 나무도 어깨에 거뜬히 지고 나르시던 아버지께서 이제는 두 손으로 나무를 끌다 쉬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시는 거예요. 부쩍 한숨을 내쉬는 일도 많아지시고. 아마도 이 일이 당신 대에서 끊길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두려움, 허전함이 크셨던 것 같아요.”
그 삶이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하니 운천 씨의 입에서도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린 시절 일만 하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되돌아보니 우리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큰 자랑이었다. ‘내가 아니면 아버지가 평생을 받쳐온 일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할게요.” “그래.” 아들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긴말은 필요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맘으로 아들에게 외롭고 고된 길을 권했는지, 아들이 어떤 맘으로 그 길을 걷겠노라 했는지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지만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운천 전수조교도마음을 다해 각자 일을 한다. 느리지만 진중하게.
가장 정직한 노동
“운천아, 여기 나무 위에 좀 앉아봐라.”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앉혀놓고 나무를 자르며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어떤 마음으로 나무를 대해야 하는지 들려주곤 하셨다. 365일 톱밥이 날리는 집안에서 나무를 자르고 켜고 그 위에 글자를 새겨넣는 모습, 그것이 아들이 기억하는 유일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리고 어느덧 아들에게도 ‘각자장’의 삶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각자 일을 시작한 지, 고작 8년째에요. 8년을 나무와 씨름하다 보니, 이제 겨우 나무의 결을 조금,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무의 결을 거스르지 않고 나무의 결을 몸으로 느끼며 한 자 한 자 새겨 넣는 일.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일이죠. 욕심내지 않고 내 잔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온몸의 신경을 손끝에 모아 글자를 새기는 고된 작업. 그 지루한 작업을 꼬박 이틀을 반복해야 겨우 목판 한 장이 완성된다. 같은 자세로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어깨와 팔목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운천 씨는 어떤 속임수도 없이 마음을 쏟은 만큼,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이 정직한 작업에 무척이나 애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잠시만 딴생각을 해도 칼끝이 엇나갑니다. 그래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죠. 그렇게 집중해 작업을 하다 보면, 나무와 칼, 그리고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어요. 나무의 결을 따라 손끝의 칼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순간, 시간도 공간도 멈춘 그 고요한 순간이 참 좋습니다.”
빠르고 편리한 것들이 많지만 조금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우리 것을 지키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임을 이운천 전수조교는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있다.
목활자의 부활을 꿈꾸다
2009년 완성한 ‘월인석보’ 복원 작업은 운천 씨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치목부터 각자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 첫 번째 복원 작업. 그동안은 각자장이 갖춰야 할 ‘기술’을 익혔다면, ‘월인석보’를 복원하면서는 각자장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
“꼬박 3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그 모양을 똑같이 찍어내야겠다는 욕심만 앞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라는 것은 단지 글자를 새기는 일이 아니라, 활자 한 획 한 획에 쏟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새기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죠.”
운천 씨가 시간이 날 때마다 박물관이나 전시장을 찾아 우리 전통문화를 보고 듣고 배우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각판인 팔만대장경은 16년에 걸쳐 완성됐죠.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하며 8만여 개에 달하는 판을 완성했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나라의 위기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수많은 각자장들이 하나가 되어 새긴 글자들, 그래서 수천만 개의 글자가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고를 수 있는 거겠죠.”
34살의 젊은 나이. 저만치 앞서 간 또래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하고, 조금 편한 길로 가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한발 앞서 ‘각자장’의 길을 걸어가고 계신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다.
“운천아. 천천히 해라. 괜찮다.”
손대패로 일일이 나무를 다듬고, 손끝에 모든 정신을 모아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넣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가 어찌 ‘촌스럽고 미련해서’겠는가? 그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빠르고 편리하게 사용하는 컴퓨터 폰트, 인쇄기술의 바탕에는 우리 선조들의 목활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 활자를 복원한다는 것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선조들의 혼을 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요즘 운천 씨는 목판, 현판, 목활자 외에도 각자 기술을 활용해 책 표지, 편지지를 만드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과거의 목활자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삶 곳곳에 부활시키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숙제라 여기기 때문이다. ‘폰트’의 시대 ‘목활자’의 부활을 꿈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