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새벽
6211번 버스는 신월동 차고지를 출발해 왕십리를 돌아 다시 신월동으로 돌아오는 왕복 3시간 거리 노선이다. 새벽 5시를 갓 넘긴 시간이지만 첫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하나 둘 차고지로 모여든다. 신월동 종점은 서민들의 삶 깊숙한 곳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곳. 버스는 늘 새벽이 왔음을 알리고 사람들을 깨우고 또 삶의 터전으로 사람들을 태워 나른다. 고창석 기사의 6211번 버스가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정류장을 차례로 지난다. 첫 번째 정류장 승객은 젊은 여성 회사원. 고창석 기사의 인사와 함께 클래식 음악이 버스 안을 채우고 있다. 새벽과 어울리는 차분하고 또렷한 음성이 더해졌다. 정류장을 지나고 사람들이 버스에 오를 때마다 친절하게 건네는 인사는 물론이고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DJ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표정이 없다.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울 것 없는 하루라도 고창석 기사의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하루는 조금은 힘차고 조금은 희망적이지 않을까. 적막했던 밤이 지나고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에 숨을 불어넣는 사람들이 6211번 버스로 하나 둘 모여지고 있다.
수험생의 방석
목동역 정류장. 핑크색 체크무늬 방석을 품에 안은 젊은 여성승객이 버스에 오른다. 앳된 얼굴과 잘 어울리는 방석을 품에 꼭 안고 버스에 타는 모습엔 힘겨움 보다는 희망과 열정이 서려 있다. 노량진을 지나는 버스라 이른 시간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도 간혹 눈에 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시험을 통해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서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늘 더 나은 삶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은 알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하루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벌써 몇 번은 더 들었을 강의를 다시 또 듣겠지만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 건 아마도 방석을 꼭 쥔 다부진 모습에 있지 않을까. 뒷좌석에 앉아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아주머니, 검푸른 강 물결을 응시하는 아저씨, 휴대폰을 만지는 청년. 누구나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생활인이기에 버스는 어느 때보다 힘차다. 고창석 기사는 그런 승객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해가 뜨기 전까지는 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선물하며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누가 들어도 편안해지는 음악이 그 아침에 승객들의 마음에 힐링의 선율을 채워주고 있었다.
약수동 해장국
동부이촌동을 지난 버스가 한남동에 이르렀다. 한남동에서 버스를 탄 중년의 승객은 왕십리를 돌아 나올 때까지 내리지 않는다. 목적지를 지났을 텐데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고창석 기사가 이유를 묻자 한남동에서 버스를 타고 왕십리로 가야 하는데 중간에 문을 열지 않았던 약수동 해장국집이 너무 오랜만에 가게 문을 연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그 해장국을 꼭 먹고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며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마치 매일 만나는 친구처럼 일상의 대화다. 평생에 한번 보고 지나칠 승객들도 있겠지만 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인사하는 고창석 기사를 보는 승객들의 마음도 약수동 해장국집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반가운 존재가 아닐까. 약수동 정류장에 문이 열리자 고창석 기사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해장국 맛있게 드시고 즐겁고 보람찬 하루 되세요.”
씨스타와 교복
왕십리를 돌아 나오면서 이미 날은 환히 밝았다.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 가까워지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탄다. 학생들이 많아지자 고창석 기사의 맞춤형 DJ가 시작된다. “학생 여러분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죠?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니에요. 학교는 놀러 가는 곳이에요. 실컷 놀고 시간 남으면 공부도 하세요. 요즘 국내 가요차트에서 1위를 달리고 있죠. 씨스타의 노래에요. 있다 없으니까.” DJ의 코멘트가 끝나자 버스 여기저기에서 학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연신
‘대박’을 외치던 한 학생은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탑승하는 친구에게 DJ 운전기사 아저씨에 대해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다. 다음 코멘트가 나오길 기다리기도 하고 메신저로 DJ버스를 알리며 신기한 등굣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등굣길의 풍경은 여느 아침과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내일도 이 버스 타고 싶다”는 학생부터 “빨리 다음 곡 소개했으면 좋겠다”는 반응까지 반기는 마음도 다양하다. 고창석 기사는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서민들이 많죠. 저마다 삶의 힘든 부분을 조금씩은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을 많이 대하다 보니 표정이나 차림만 봐도 어떤 고민이나 생각이 있겠다 예상하게 되고 그런 부분들을 성인이나 위인들의 말을 빌려 용기와 희망을 갖을 수 있게 하고 또 음악을 통해서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 그것이 제가 버스 DJ를 하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라고 했다. 그저 흘러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고창석 씨의 버스 안에서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동부이촌동의 일본인들
동부이촌동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6211번 버스가 동부이촌동에 들어서면 안내방송에도 영어와 함께 일본어가 추가된다. 사실 최근까지 고창석 기사는 신월동 차고지에서 서울역을 왕복하는 603번 버스노선을 운행했다. 오랜 DJ활동의 연으로 많은 승객들과 친분이 생겼고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 10년 동안 운행했던 603번 노선과 6211번 노선은 승객들의 이용태도에 차이가 있다. 603번 승객은 버스에 머무는 시간이 긴 반면 6211번은 주로 지하철이나 목적지로 가기 위한 환승 목적으로 이용하는 승객이 많아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그렇다 보니 아직 승객들과의 친밀함이 덜 하고 때로는 어색하기도 하지만 새롭게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건 그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최근 그의 음악목록에는 일본가요가 추가됐다. 동부이촌동을 지나는 낮에 일본가요를 틀어주면 타향에서 생활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타지 버스에서 울리는 자국어 노래에 기뻐하고 고마워하기도 한다. 나이나 성별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그의 버스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선물. 그것은 배려와 용기와 희망의 공감대다.
아낌없이 주고 얻는 것
버스에서 DJ생활을 시작한 지도 언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쌓인 사연만 해도 가방에 한가득 이다. 버스에서 승객들이 그에게 주고 간 쪽지들에는 그가 전하려던 마음이 실제 승객들에게 울림을 주었다는 내용이 많다. ‘재수하면서 너무 힘들었을 때 아저씨 버스 타고 아저씨 말씀 들으면서 많이 위로 됐었는데(혼자 막 눈물 찍고ㅋ), 드디어 다시 이렇게 아저씨를 만났네요. 아저씨 방송 정말 좋아요, 앞으로도 좋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목동 사는 어떤 소녀) / 기사 아저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아저씨가 저의 마음을 풀어주시네요. 차를 타고 기분 좋아 보기는 처음이네요. 정말 고맙고 즐거웠어요(어느 소녀가).’ 한번은 이혼 직전까지 같던 중년부부가 고창석 기사의 사랑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버스에서 극적으로 화해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버스에서 DJ를 하기 위해 고창석 씨가 준비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그의 노트북에 들어있는 5만 곡이 넘는 음악파일들은 퇴근 후 그의 일상을 포기하기면서까지 모아놓은 곡들이다. 빼곡히 적혀있는 노래에 얽힌 사연 또한 켜켜이 쌓여있다. 자신의 시간을 타인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또한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이 많다고 말한다. “솔직히 제가 DJ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은 저를 위한 시간이기도 해요. 저 또한 즐거우니까 할 수 있고 이런 진정성이 없이는 승객들과의 관계에서도 탈이 났어도 벌써 났겠죠. 이렇게 많은 매체를 통해 저의 활동이 알려지는 것은 그만큼 치유 받고 싶은 이들이 많다는 거겠지요. 저 또한 손님들을 통해 이미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버스가 닿는 정류장에는 오늘도 봄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가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