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사람 이.문.재.
어김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 KBS <개그콘서트> 연습실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2011년 KBS 26기 공채 개그맨으로 뽑힌 이문재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 부지런히 고민하고 대본 연구하고 연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른 살에 공채 개그맨이 되었으니 후배, 동기는 물론이고 선배들보다도 어떤 경우에는 나이가 많아요.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스스로 노력하는 게 맞는 것 같았어요.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 잠시나마 혼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면 ‘지금 이 모습이, 이 순간이 꿈은 아니겠지’라고 생각 들 때가 있어요. 간절히 원했던 개그맨의 꿈이 이루어졌는데 아직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날씨가 궂은 날에는 버스를,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러 출근하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습니다.” 하여 3년 차 신인 개그맨 이문재는 오늘도 제일 먼저 <개그콘서트>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코너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방송국, 집, 권투도장(이문재는 지인과 함께 권투장을 운영하고 있다)을 오토바이로 오가는 것이 대부분의 일상인 이문재를 사람들은 잘 알아보지 못한다. 어느 날, 권투도장에서 스파링하는 연습생이 말했다. “관장님, 그거 아세요? 개콘에 나오는 사람 관장님이랑 진짜 닮았어요”라고.
13전 14기 이.문.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는 도전을 해 꿈을 이룬 사람을 향해 우리는 ‘칠전팔기(七顚八起)’ 만에 성공했다는 사자성어를 빌어 그 성공을 높이 산다. 하지만 개그맨 이문재에게 칠전팔기는 그저 지나온 한 과정일 뿐이었다. 8전9기, 9전10기를 이겨내고 이겨내며 마침내 그는 13전14기만에 꿈을 이루었다. 20대를 오로지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공들이며 보낸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맺고 싶었다고 했다. 29살, 13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길이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한 번 더 해보자, 할 거면 더 치열하게’라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개그맨 시험에 도전, 2011년 그렇게 꿈꾸고 원했던 KBS 26기 공채 개그맨에 합격을 했다.
“개그에 ‘개’자도 몰랐고 더욱이 연기에 ‘연’자도 몰랐던 제가 개그맨이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키웠으니 저도 저지만, 지켜보시는 부모님이나 가족들, 친구들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도 꼭 되고 싶었어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네요.” 절망에서 다시 시작한 그의 개그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진정한 웃음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대학로 극단 이.문.재.
뒤늦은 꿈을 안고 대학로에 입성, 극단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기를 5년. 13번의 개그맨 시험을 치르는 동안 대학로 극단은 그에게 유일하게 쉴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벗어나고 싶은 굴레 같은 것이었다. 밤이면 무대에 간이침대 하나 놓고 잠을 자며, 식권 한 장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변변한 티셔츠 한 장 사 입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도 했지만 개그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강해졌다.
“개그맨 시험이 매해 2~3월에 있어요. 그러다 보니 20대의 겨울을 온전히 즐기며 보내본 적이 없어요. 오로지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고, 어떤 개그를 짜서 연기를 선보일까, 매일 고민하고 대본 쓰고 연습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대학로’라는 지나온 정류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의 생활을 묻자, 그는 ‘어우, 어우’하며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이내 대학로 무대가 더 자유롭게, 더 이문재답게 개그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결코 잊을 수 없는, 자꾸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고향 같다는 그다.
나쁜 사람 이.문.재.
일요일 밤이면 “나쁜사람, 나쁜사람”을 외치며 슬피 우는 사람이 있다. 범인을 붙잡아 조사하다 범인의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가만두지 않겠어’라며 등장해 다시 범인을 조사하는 선배 형사에게 “나쁜사람, 나쁜사람, 왜 그랬니?”라며 풀어주자고 흐느낀다. 예를 들면 어린이 납치범인 범인은 알고 보니 입양 갔던 동생이 헤어지기 싫다고 해 데리고 있었다거나, 아이돌 스토커인 줄 알았는데 매니저였다거나 하는 식이다. 웃음 속에 슬픔이, 슬픔 속에 웃음이 녹아 있는 그만의 웃음코드다. 그가 기획하고 첫 회는 대본까지 직접 썼다.
“개그콘서트에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권 장군이 전쟁에 나갈 병사가 없다고 하자, 왕은 그럼 네 아들이라도 내보내라고 하죠, 이에 장군이 말하길, 제 아들은 이제 돌이 지났습니다. 그러는데 너무 웃겼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했죠. 더 힘들어지고 슬퍼지면 어떨까 하고요. 관객 반응이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었죠. 제 방식대로 구성해봤던 것인데, 재밌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스스로 애드리브가 없는 개그맨이라고 말하는 이문재. 대사 한글자 한글자, 표정 하나하나 그는 거듭 대본을 수정해가며 그렇게 연습하고 무대에 오른다. 철저한 준비와 연습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을 것이다.
“이제는 좀 밝은 개그를 해보고 싶어요. 죄수복을 입고했던 ‘있기 없기’ ‘어르신’ 그리고 ‘나쁜사람’까지 좀 무겁고 어두운 개그를 보여 드렸어요. 이제는 밝게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개그에도 도전해 보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선보인 코너가 지난 6월 16일 첫선을 보인 ‘두근두근’이다. 선배 여자 개그맨 장효인과 박소영이 함께 출연하는 ‘두근두근’ 역시 그가 기획한 코너로 오랜 친구에서 두근두근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그만의 개그로 밝게 선보였다.
나쁜사람 코너에 함께 나오는 후배 개그맨 이찬은 대학로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후배다. 같은 꿈을 품고 같이 고생하고 다시 같은 꿈의 무대에서 함께할 수 있어 더없이 즐겁다는 이문재다.
이.문.재. 일단 종점 도착
“더 이상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요. 여전히 아이디어를 짜고 그에 맞는 코너를 준비하고 연습하는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종점에 잘 내렸으니 뭐랄까 안심은 됩니다. 그렇다고 초심을 잊은 건 절대 아니고요, 이 종점을 또 다른 도전을 위한 정거장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더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제게 개그콘서트는 종점이자 정류장이예요.” 이문재는 스스로 말한다. 대학로 극단이라는 긴 정류장을 통과하고 개그콘서트라는 종점에 도착해 이제야 뒤를 돌아보고, 잘할 수 있는 것, 잘하는 것에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대학로 공연 당시, 항암치료를 마친 어머니와 마음껏 웃고 싶었다며 개그공연을 보러온 모녀처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웃음을 주는 개그를 계속해서 선보이고 싶다는 이문재다. 그는 지금이 종점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들은 안다. 종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버스가 출발한다는 것을. 도전 끝에 무너져 지긋지긋하게 울어본 개그맨 그러나 다시 도전하는 개그맨, 성실한 개그맨, 노력하는 개그맨 이문재의 여의도 출발행 버스가 어디로 출발할지 자못 궁금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