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할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아침 7시. 깨끗이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시원하게 콩나물국도 끓인다.
딸 혜림이(8세)와 연우(6세)가 좋아하는 계란프라이까지 더해 푸짐한 아침상을 뚝딱 차려내는 손끝이 야무지다. 남편에겐 잘 구운 토스트 한쪽과 커피 한 잔을 차려준다. 그렇게 네 가족이 함께 식사한 후 아침상을 정리하고 남편 출근과 아이들 등교를 챙기고 나서야 트란 티 투항 씨의 하루가 시작된다. 바쁜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이주노동자 단체인 ‘꿈을 이루는 사람들’ 센터. 이곳이 트란 티 투항 씨가 2008년부터 매일 아침 출근하는 직장이다. “한국으로 시집을 온 후, 한동안은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어요. 힐긋힐긋 쳐다보는 시선이 싫었거든요. 4년 전, 친구의 소개로 ‘꿈을 이루는 사람들’에서 일하게 되면서 베트남 새댁, 혜림이 연우 엄마가 아닌 제 이름을 찾게 됐어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집안일 하랴, 센터 일하랴 몸은 힘들지만 내 일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몰라요.”
네, 꿈을 이루는 사람들의 트란 티 투항입니다
트란 티 투항 씨의 업무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네. 꿈을 이루는 사람들의 트란 티 투항입니다.” 하루에 적게는 100번에서 많게는 200번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이야기는 100가지, 200가지로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남편의 폭력에 몸과 마음을 다친 이주여성의 울먹임, 임금을 받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의 억울함, 공장에서 일하다 다쳤지만 보상 받을 길이 없어 병원조차 못 가는 외국인 노동자의 막막함.
트란 티 투항 씨가 전화 너머로 들리는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트란 티 투항 씨가 그들에게 주기 원하는 것은 위로만이 아니었다. 낯선 한국 땅에 올 때 가슴에 품었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그들이 억울함과 상처를 가진 채 한국을 떠나지 않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고용법을 공부하고, 경찰서와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는 회사에 찾아가 대신 싸우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아쉬운 소리도 해야 했다. 남들보다 서툴고, 느리지만 그녀가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간절한 목소리 때문이다.
“트란 티 투항 선생님이시죠?”라며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는 베트남 신부입니다
트란 티 투항 씨는 이주여성이다. 8년 전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베트남 신부’라고 불렀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경제적 이유’로 국제결혼을 택하듯, 그녀도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행을 택했다.
그녀의 나이 고작 24살. 남편의 착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는 트란 티 투항 씨는 ‘행운’을 바라며 베트남을 떠나왔다. “대부분의 국제결혼이 상대를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상태죠. 남편과 마음이 잘 맞고 시댁 식구들이 따뜻하게 안아주면 정말 행운인 거죠. 그 행운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어요.”
한국이란 낯선 나라에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베트남에서 딱 한 번 본 남편뿐.
생활방식도 문화도, 언어도 다른 타국에서 남편은 유일한 ‘내 편’이 되어주었고, 왜곡된 시선과 차별로부터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혜림이와 연우가 태어나면서 가족이 생겼고 행운을 바라며 온 한국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많은 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트란 티 투항 씨처럼 행복을 찾아 한국행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처럼 행복을 찾는 행운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고, 그들을 위해 도움되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녀는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베트남 노동자를 위해 경찰서와 보험회사, 법률센터 등을 오가며 3,200만 원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암에 걸린 노동자에게는 수소문 끝에 무료로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알아봐 주고, 공장에서 일하는 도중 손가락이 절단된 젊은 베트남 청년이 남은 인생을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용기를 주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구미에서 서울까지 수십 번을 오가며 방법을 찾아주었다. 힘이 닿는 데까지 마음을 다했다.
많은 이주여성과 노동자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신의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그녀는 그들에게 미안하다 했지만, 트란 티 투항 씨를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속마음을 나누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음성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멀리 고향에 있는 엄마의 따뜻한 다독임, 친구 같았던 언니의 위로의 손길. 그래서 그들은 트란 티 투항 씨에게 진심을 다해 얘기한다.
“고맙습니다.”라고.
한국과 베트남 사이, 사랑의 다리가 되어
트란 티 투항 씨는 ‘꿈을 이루는 사람들 센터’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만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고와 질병으로 더 이상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없어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가끔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한국에서 생을 달리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장례를 치러주고, 유골이 되어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지켜봐야 했다.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갖고 떠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건강을 혹은 생명을 잃고 떠나지만, 베트남에서의 삶과 그곳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삶이 조금은 편안할 수 있도록 보상금 문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챙겨주려고 하고 있죠.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외국인 노동자의 편에만 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일하는 업체들 중에는 사정이 어려운 중소업체들이 많은 만큼, 대화를 통해 서로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트란 티 투항 씨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순천향대학교 구미병원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의료진 사이의 소통을 돕는 일이나, ‘꿈을 이루는 사람들’과 함께 불의의 사고로 돌아간 베트남 노동자의 마을에 화장실을 지어주는 일. 트란 티 투항 씨는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 서로의 마음이 오고갈 수 있는 ‘사랑의 다리’가 되어줄 것이라 믿고 있다. 뱃속에 있는 셋째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날 세상은 그 다리로 인해 조금 더 아름다울 수 있길, 그녀는 오늘도 출근길 정류장에서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