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전 내관 형선 만나다
“처음 드라마 제의를 받았을 때 ‘설마’ 했어요. 정말 나한테 온 역할이 맞나 했었죠. 막상 촬영 전날이 되었는데도 실감이 안 나더라구요. 첫 촬영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아, 진짜 내 역할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배우 정은표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어떻게 하면 형선의 이미지를 맛깔스럽게 표현해낼 수 있을지. 평소 아내와 아이들과 주고받던 대화, 표정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대본에 맞게 응용도 해보고, ‘내가 진짜로 형선이라면 이런저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표정이나 행동을 저축하듯 쌓아나갔다. 그런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TV 화면을 통해 전달되었고 우리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내관 형선을 보며 드라마 보는 재미를 더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어 오라는 훤의 명령에 그는 지붕으로 올라가 눈사람을 만들어온다. 그리고 돌아와 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절규(?)를 한다. “돌아서 있으라”는 명령에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돌아선다. 훤이 무녀 월이 연우라는 사실을 알고 울 때 형선도 울었다. 훤과 연우의 사랑이 맺어지던 마지막 순간, 형선은 뒤에서 가야금을 탔다. 끝까지 왕의 그림자처럼 친구처럼 어머니처럼 그는 때론 진지하게 때론 코믹하게 훤의 곁을 지킨 인물이었다.
“함께 연기했던 수현(이훤 역)이나 재림(운 역)이나 무척 편했고 나이차이가 조금나지만 친구처럼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촬영하는 동안에는 진지했지만 카메라가 쉬는 동안에는 셋이 참 재미있게 수다 떨고 장난치며 지냈어요. 드라마가 끝나서 아쉽기도 하지만 후배들이랑 헤어지는 게 더 아쉬어요.”
‘형선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라는 고민을 마지막 촬영하는 순간까지도 했지만 정말로 최선을 다 했기에 후회는 없다는 정은표. 다행히 시청자들이 좋아해 주었고 사랑해주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는 그이다. ‘깨알 형선’ ‘귀요미 형선’을 더는 못 보는 것이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못내 아쉽기만 하다.
존재감 있는 배우로 거듭나다
긴 무명생활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아내와 아이들 덕분이라는 정은표.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며 연기에 대한 매력을 느껴 배우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서울로 상경해 그는 서울예전 연극과를 나와 극단에서 줄곧 연극을 했다. 지금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연극무대라며 언제고 기회가 생기면 연극무대에 서고 싶단다. 드라마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을 해왔지만 큰 존재감은 없었다. 더군다나 어느 순간부터는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없이 활동을 하다 보니 그마저도 뚝 끊기고 그는 1년을 거의 집에서 놀았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 아내가 빵 만드는 자격증이 있었어요. 집 앞 제과점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더 배울 겸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제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려고 ‘배운다’라고 하더라고요. 아내가 그때 30만원을 받았는데 10만원은 저 기죽지 말고 나가서 운동하라고 헬스장 이용권을 끊어줬어요. 너무 고맙죠.”
마침 인터뷰하는 카페에 뒤따라 온 그의 아내가 옆자리에 앉아 “괜찮아, 괜찮아”라며 여유 있는 웃음을 건넨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 우연히 <스타주니어쇼 붕어빵> 출연 제의를 아들과 함께 받았다. 아들 지웅이가 당시만 해도 7살, 잘할 수 있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출연을 했는데 반응은 상상외였다. 지웅이가 멋지게 해주었고 지웅이와 아빠 정은표는 그날로 고정 출연자가 되었다. 이후 하은이가 프로그램에 합류하면서 정은표도 아이들도 스타가 되었다.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이 생겼죠. 그런데 저나 아이들이나 스타가 되었다는 생각이나 느낌은 없어요. 아이들은 소풍 가는 기분으로 방송국에 갔고, 저는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웠던 것 같아요.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 선택에 따르죠. 다행히 아직은 아이들이 소화할 만큼의 일정들이고 또 즐거워하니까 고맙죠.”
그는 스스로 아이들 덕분에 ‘정은표’라는 사람의 인지도를 높였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라고 해서 그런 기회를 준 프로그램 관계자들이 고맙고 지웅이와 하은이도 무척이나 고맙다고 한다. 그러나 ‘배우 정은표’에 대한 생각은 갈수록 깊어졌다고, ‘내가 배우로서는 매력이 없나’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형선을 만난 것이다.
거짓말도 슬기롭게 넘기는 백점 아빠
아빠 정은표로서 그는 백점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기보다 아이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들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그저 옆에서 도와줄 뿐이다. 형선이 역할을 하는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의 촬영장 운전기사를 맡아 했고, 촬영 끝나고 늦은 밤 집에 들어가서도 틈틈이 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들 아주 어려서부터라고. 그런 영향 때문인지 아들 지웅이는 영재 판정을 받았고 둘째 하은이도 그에 못지않은 IQ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앞으로 검사를 더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무엇이든 아이들이 원해서 즐겁게 했으면 좋겠어요. 원하는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즐겁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으면 좋겠어요. 공부가 다는 아닌 것 같아요.”
언제나 아이들을 믿어주고 아이들의 생각을 우선시 하는 아빠다. 가끔 아이들이 일상의 작은 것들을(이를테면 컴퓨터게임을 했는데 안했다고 했을 때) 숨기려고 할 때도 그는 기꺼이 쿨하게 받아준다. 아이를 무안하게 하기보다 야단을 치기보다 자연스럽게 아이로부터 말을 꺼내놓도록 하고 앞으로는 약속을 잘 지키자고 이야기를 한단다. 지혜로운 부모다. 그러니 아이들은 무엇하나도 숨길 것이, 거짓말 할 것 없이 재잘재잘 학교 얘기, 친구들 얘기를 늘어놓는다고.
“아이들이 그래요. 아빠, 오늘 밤 세들? 네들? 무엇이냐면 자기들 잘 때 세 번, 네 번 들어와 얼굴 봐달라는 말이에요. 오늘 밤은 세들만 하렵니다.”
배우 정은표
1990년 연극 <운상각>으로 데뷔
드라마 MBC <해를 품은 달>
SBS <스타주니어쇼 붕어빵> <파라다이스 목장> <싸인> 등 영화 <식객> <해바라기> <마파도> 등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