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에 간 인문계 소년, 윤한
최근 한국 가요계는 흡사 정글처럼 치열하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K팝이 강세를 보이고, 주말 TV 예능 프로그램은 새로운 뮤지션을 찾기 위해 방송이 안방을 잠식했다. 음원 사이트에서는 실시간으로 1위가 바뀐다. 음반을 출시하고 방송 활동을 하며 대중적 반응을 보일 때까지 꾸준히 기다리다 서서히 끓어올라 길거리에서 익숙하게 유행곡을 듣기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과거 가요계의 은은한 모습을 이젠 찾을 수 없다. 아이돌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그보다 더 현란한 리듬과 멜로디는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이러한 대중음악계에 2010년에 등장한 싱어송라이터 윤한이 반가웠던 것은 너무 빠르지도, 지나치게 격정적이지도 않은 편안함과 담백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길거리 캐스팅 제안을 많이 받으면서 오디션도 몇 번 봤죠. 그러면서 음악을 접하게 됐고 음악을 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고2 때 TV에서 가수 김동률 씨를 봤는데,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작곡도 직접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가야 할 음악의 길을 정했어요. 김동률 씨 같은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먹었죠.”
보수적이고 엄한 집안의 분위기라 부모님께서 그의 결심을 반대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쉽게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 대신 음악을 할 거라면 제대로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마침 뮤지션의 길을
제시해 줬던 김동률도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간다는 이야기길 들었던 윤한 씨, 버클리 음대는 자연스레 당장의 목표가 됐다. 어려서 피아노를 배우기 싫어 도망 다니기 바빴다는 그가 피아노 레슨과 화성학 등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생이었던 윤한은 버클리 음대의 입학허가증을 받는 데 성공했고 뮤지션으로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급작스러운 결정이었고 다소 충동적인 시작이었지만 사람의 인생이란 어쩌면 찰나의 마주침으로 결정되는 것인지 모른다. 윤한에게 음악과의 만남과 선택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이뤄졌지만 그의 앞으로 걸어야 할 길고 긴 뮤지션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음악은 내 안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어린 시절 피아노를 싫어했던 윤한은 재즈피아니스트가 됐고, 작곡가가 되리라 결심했던 그는 벌써
와 2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작사, 작곡, 편곡, 노래, 프로듀싱까지 모두 혼자의 힘으로 해낸 성과물이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출사표를 던진 신인 뮤지션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음악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기에 모든 과정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제 음악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연애하면서 느꼈던 생각이나 감정들을 극대화하기도 하고, 담담하게 회상하기도 하면서요. 실제로 1집에 담긴 ‘March 2006’은 제가 썼던 편지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가사로 썼어요.”
과거를 회상하며 작업했다는 1집 의 수록곡 ‘March 2006’은 유학을 마치고 입대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그의 마음을 붙잡았던 연인에게 보냈던 솔직한 고백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편,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낸 2집
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설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때의 격정, 이별 후의 쓸쓸함 등 연애를 하며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다. 한국의 음악지형에서 소수의 마니아들 외에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재즈’라는 장르를 자신의 감성과 이야기로 쉽게 풀어낸 것이다. 음악이란 때론 어떤 말보다 더 풍부하고, 정확함을 가진 직관의 언어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음악은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 전에 부서지고 만다. 어려운 음악이라는 편견을 깨고 윤한의 음악이 대중에게 성큼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현학적인 표현이나 꾸밈없이 그가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진심이란 솔직할 때 가장 잘 전달되는 법이니 말이다.
싱어송라이터, 뮤지컬 배우가 되다
재즈는 클래식 음악처럼 정확한 음계와 박자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기분과 느낌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윤한의 앨범에 R&B와 팝재즈, 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가 조화를 이룬 것은 재즈가 가진 힘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국내 최초의 ‘액터-뮤지션 뮤지컬’ <모비딕>의 주연 ‘이스마엘’로 출연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자유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리라.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때는 거절을 했었어요. 이제 음악을 시작하는 제가 뮤지컬에 도전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결정을 잘 한 것 같아요. 연기를 통해 기쁨과 슬픔 등 감정을 풍부하게 배울 수 있었죠.”
기존의 뮤지컬에서 연주자는 세션의 영역이었다면 <모비딕>에서의 연주는 연기가 된다. 사실 음악과 연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내면의 감정을 증폭시켜 섬세한 결로 다듬어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윤한은 뮤지컬 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그 안에 가진 잠재력의 영역을 개척하고,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시작점에 선다는 것은 다양한 가능성의 영역에 서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음악과 무대의 장르는 윤한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고 긴 음악의 인생에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과정이며 그 시간을 관통하면서 그의 음악은 더욱 성숙할 것이다. 4월 말, 뮤지컬 공연을 마친 후 5월 26일 미니콘서트로 돌아가는 윤한의 모습이 궁금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두 장의 앨범과 뮤지컬 무대로 그의 음악과 활동영역을 몇 마디의 말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수채화처럼 담백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채를 내는 그의 음악은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을 만나 더 많은 빛깔과 선율로 변주되리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또다시 지친 일상의 순간순간에 위로받을 것이다.
윤한. 1983
버클리 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 영화음악 작곡 전공
2010. 11. 1집 발매, 데뷔
2010. 12. 디지털 싱글 <그대를 그리다> 발매
2011. 02. 미술과 음악의 만남 <아르츠 콘서트> 참여
2011. 05. 서울 재즈 페스티벌 Special Stage 공연
2011. 06. Limited Edition 발매
2011. 07 피아노 연주 앨범 발매
2012. 02. 2집 발매
2012. 03 액터-뮤지션 뮤지컬, <모비딕>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