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무대를 만나다
최정원은 솔직하다. 어느 한구석 미화시키는 법 없이,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 꿈과 현실을 무대에 오롯이 담아낸다. 욕심을 내기보다는 진심을 담을 줄 아는 배우 최정원. 하지만 단 한순간도 무대 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낸 적은 없다. 그녀에게 무대는 오랜 기다림을 통해 허락된 꿈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했어요. 제 몸과 제소리를 이용해서 최정원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어요. ‘뮤지컬 배우’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그 시절부터 저는 ‘뮤지컬 배우’를 꿈꿨던 거죠. 고등학교 3학년 때 뮤지컬 배우가 됐고,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뮤지컬 배우’란 이름으로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뮤지컬 배우로 성공해서 큰 인기와 성공을 얻겠다는 꿈은 처음부터 없었다. ‘뮤지컬 배우’란 명칭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 보장된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할까?’란 질문에 망설임 없이 떠오른 것이 노래와 춤, 그리고 연기였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무대는 최정원에게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무대 위의 삶을 택했다.
“첫 무대요? 기억나죠. 1989년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배역의 비중은 아무 상관 없었어요. 무대에 서서 노래하고 춤추고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요. 마냥 행복했죠.”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첫 무대. 다음 해 같은 작품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면서 최정원은 뮤지컬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무대 뒤,
숨은 열정과 노력
타고난 노래와 춤 솜씨, 그리고 무대를 즐길 줄 아는 열정까지. 어쩌면 최정원이 뮤지컬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는 매 순간 인내와 포기가 함께 했다. 청춘이 누려야 할 특권은 내려놓고 온전히 뮤지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같은 노래를 수천 번 반복해 부르고,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춤 연습에 발바닥엔 물집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하지만 최정원은 불평을 늘어놓지도, 꾀를 부리지도 않았다. 이미 정상의 위치에 섰음에도 그녀는 왜 그리 지독하게 연습에만 매달렸을까?
“100번 부른 노래와 1000번 부른 노래는 분명 차이가 있어요. 물론, 같은 작품을 여러 번 공연하다 보면, 노래나 춤은 이미 완벽하게 내 것이 되죠. 그럼에도 노래하고 춤추는 연습을 계속하는 건, 무대 뒤의 연습이 무대 위에서 자신감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나에 대한 믿음, 무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연습밖에 없어요.”
무엇보다 시간과 물질을 들여 자신의 무대를 보러 오는 관객들을 위한 최소한의 책임. 그것이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최고의 무대를 선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최정원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인 다기보다 객석의 관객에게 자연스레 스며드는 배우가 바로 최정원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몸짓과 목소리, 무대 위 그녀의 잔영이 오래 남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행복한 무대를 꿈꾸다
뮤지컬 <시카고> 공연 중인 최정원은 늘 그랬듯 모든 에너지를 공연에 쏟아 붓고 있다. 너무 많이 불러 툭 치면 저절로 나오는 노래를 또 부르고, 이미 몸이 기억하는 춤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최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한 인내와 노력은 23년 전 그대로지만, 그녀의 무대는 더 넉넉하고 따뜻해졌다.
“예전에는 내가 노래를 잘하고, 내가 춤을 잘 추고,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물론 그것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나와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배우들이 더 잘 보이죠. 상대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상대의 움직임에 한번 더 눈길을 주면서 함께 하는 이들의 감정을 읽어내는 마음이 생겼다고 할까요? 액션이 아닌 리액션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최정원은 무대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게 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연과 조연의 경계가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빛나는 법을, 그 행복함을 무대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 공연 중인 시카고도 여러 번 공연했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예전에 했을 땐 못 봤던 부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보여요.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주름도 늘었지만, 그만큼 인생의 깊이가 더해졌으니까요.”
대사 뒤에 숨어 있는 행간의 감정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는 최정원. 시간이 더 흘러 흔히들 얘기하는 조연, 더 작은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그녀는 더 깊어진 연기를 할 자신이 있다. “마지막 무대에서의 연기가 최고의 연기일 것”이라고 단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23년 동안 제가 섰던 모든 무대에서 전 항상 행복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단 한번도 행복하지 않은 무대가 없었어요.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은 힘들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그 행복을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 제가 느낀 행복을 소중한 관객들에게 더 잘 전해 드리기 위해 더 치열하게 연습하는 거겠죠?”
인터뷰를 마치고, 공연을 위해 무대로 향하는 최정원의 발걸음에서 설렘과 기대가 묻어났다.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배우 최정원. 그녀는 오늘도 행복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
배우 최정원은 현재 뮤지컬 <시카고>에서 벨마켈리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이 공연은 디큐브아트센터에서 10월 7일까지 진행된다.
뮤지컬 배우 최정원
1989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데뷔
1995 제1회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연기상
1996 제2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조연상
1997 제3회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01 제6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
2002 제7회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06 대구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09 제17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뮤지컬 부문 최우수상
2010 제4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올해의 스타상
2010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