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최기영 대목장
기억에 남지 않는 공사가 있다면
그는 장인이 아니지
(좌)최기영 대목장은 집을 다 지어 놓고도 마음에 안 들면 기둥을 뿌리째 뽑아버릴 정도로 우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찰과 한옥 문화재까지 그의 이러한 손길을 거친 것만 해도 200채가 넘는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고 많이 배우지도 못한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손재주와 노력뿐이었다 목수 일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었던 그는 하루에 4시간만 자는 등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사람 말고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사람아!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결정하는 겨.”라는 금융회사 CF를 얘기하면 대부분 기억을 더듬어 그를 떠올린다. 그 광고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목장으로, 소중한 문화유산 복원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최기영 대목장이다. 대목장이란 궁궐이나 가옥 등 건축물을 짓는 목수 중에서 설계와 시공, 감리 등을 도맡아 책임지는 사람을 말하는데, 현재 생존해 있는 대목장은 세 명뿐이다. 50년 삶을 오직 전통 건축 외길 인생으로 채워온 그의 ‘인간극장 스토리’를 듣기 위해 기자는 마음이 급했지만 “녹차 한 잔을 다 마셔야만 이야기한다”는 그의 말에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인터뷰에 앞서 몇 년 전에 인상적으로 본 CF를 여담으로 꺼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촬영 당시 광고주가 가져온 콘티가 평소 자신이 쓰는 말투와 달라 현장에서 직접 자신의 말투로 고쳐 다시 촬영했다는 얘기였다.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5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 고생했던 그 시절, 그는 초등학교와 서당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민 끝에 그는 남들보다 나은 손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목수가 되기로 결심한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그의 나이 열일곱, 무작정 당대 최고 도편수였던 김덕희 옹이 공사중인 수덕사로 향했다. 그때부터 도편수 김덕희, 김중희 옹 밑에서 목수 일을 시작했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고 많이 배우지도 못한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손재주’와 ‘노력’뿐이었다. 목수 일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낮에는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스승이 하는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어깨 너머로 배웠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전통 양식이 살아있는 고건축물이나 고궁을 찾아다녔다. 밤에는 달빛을 호롱불 삼아 책을 보면서 전통건축물을 연구했다. 그리고도 궁금한 것은 덕수궁, 창경궁 담장을 몰래 넘나들며 수십,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고궁의 건축양식과 문양 등을 연구했다. 그곳에서 이슬을 맞아가며 밤을 지새운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 결과 그는 다른 목수들이 10년 이상을 배워야 할 것을 몇 년 만에 배울 수 있었다. 그 몇 년 동안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노력한 결과였다.
“살면서 네 시간 이상은 자 본 적이 없어. 잘 거 다 자고 대목장이 되고 베테랑이 돼? 어떤 분야든지 마찬가지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일에는 공짜가 없어. 내가 정성을 들이고 공부한 만큼 얻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니까. 남들 잘 때 대패질, 못질 한 번 더 했으니까 여기까지 온 겨.” 스승 곁을 떠난 그는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맛, 짠맛”을 겪었지만 그런 경험들이 소중한 자산이 되어 비온 뒤의 땅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네 가지 오묘한 맛이 버무려진 뒤인 40년 전, 법흥사 무설전 공사를 무수한 찬사를 들으며 완성했다. “쓰고 신맛을 경험하면서도 목수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어. 죽더라도 한 번 선택한 길은 끝까지 앞으로 내딛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미련하긴 해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텼으니까 오늘의 내가 있겠지?”
그의 이런 우직한 성격은 일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집을 다 지어놓고도 마음에 안 들면 기둥을 뿌리째 뽑아버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매사에 한 가지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그의 솜씨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단산서원, 내장사, 마곡사, 용문사, 봉은사 등의 사찰과 한옥, 문화재까지 그의 손길을 거친 것만 해도 200채가 넘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갔던 공사를 물었다가 꾸지람만 들었다. “기억에 남지 않는 공사가 있다면 그것은 장인이 아니지. 전부 다 기억에 남아. 어떤 것은 평범하게 했고 어떤 것은 심혈을 기울였다면 기억에 남는 것이 있겠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사소한 모든 것까지 소홀하게 한 것이 없어. 두들겨보고 생각해보고 또 연구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철저한 고증과 끊임없는 노력,
하앙식 기법과 들기름
지난해에는 자그마치 10년의 공사 기간을 거친 백제문화단지를 완성했다. 백제 시대의 왕궁과 사찰, 목탑 등 총 184동의 전통 건축물을 그대로 구현해 낸 것이다. 백제문화단지는 부여가 도읍이었던 서기 600년대 백제의 한옥을 되살렸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문화재 복원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설계, 건축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 하는데, 백제 문화에 대해서는 발굴된 자료보다 소멸된 것이 많아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재현한 백제궁을 비롯한 건축물들이 당시 백제의 그것과 똑같지 않다는 점이 공사의 최대 난관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역사 왜곡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0년 동안 열흘도 채 쉬지 않으며 백제와 관련된 고서란 고서는 수없이 뒤졌고, 특히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세밀하게 살폈다. 하지만 이들도 모두 12~13세기의 것으로 국내에서는 백제 건축 양식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중국과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백제 문화에 영향을 준 중국과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건축양식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특히 백제와 활발하게 교류한 중국 뤄양과 일본 교토를 주목했다. 그리고 20여 차례의 답사와 철저한 고증을 거친 끝에 못을 쓰지 않고 목재와 목재만 얽어 처마의 하중을 지탱하는 ‘하앙식 기법’을 백제문화단지에 적용했다.
철저한 고증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공사를 한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놀라운 기법을 적용했다. 800년 동안 풍우작용으로 뒤틀린 나무에 들기름을 발라 곧게 펴 성공적으로 복구한 것이다. “들기름은 개발한 것이 아니고 선조들의 지혜를 본받은겨. 물론 이 역시도 그동안의 경험들을 토대로 문헌도 참고해 가면서 얻어낸 방법이지. 장인이란 모름지기 책 읽기에 소홀하면 안 되지만 무엇보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야 돼. 실력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자질, 총명함, 집념, 끼도 있어야 한다는 겨.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시간을 아까워하게 되면 긍지와 자부심도 사라지게 되거든. 그러면 장인으로서는 끝이야.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어. 반복해서 관찰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면 답이 나오는 법이지. 우리 인생처럼 말이야.”
지난해 그는 무려 1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백제문화단지를 완성했다. 백제시대의 왕궁과사찰 목탑등총 184동의 건축물을 그대로 구현한것이다. 여기서 그는 철저한고증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못을 쓰지않고 목재와목재를 얽어처 마의하중을 지탱하는 하앙식기법을 적용했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두 가지 꿈
최근 그는 숭례문이 온전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고문서를 꼼꼼히 살피는 동시에 가장 오래된 목교인 월정교 복원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15로 축소한 월정교 모형을 8개월에 걸쳐 만든 그는 지금도 틈이 나는 대로 월정교 현장에서 공사를 지휘하고 있지만 죽기 전 반드시 이루고 싶은 두 가지 꿈이 있단다. 하나는 문화재 복원뿐만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건축용어사전 제작에 정성을 쏟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 최대의 목탑인 경주 황룡사9층목탑을 복원하는 일이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어.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또 욕심 부리고 싶은 게 있어. 건축용어사전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거야. 전통건축용어 대부분이 일본어로 되어 있어. 일제시대 때부터 철저하게 왜곡된 것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거지. 왜곡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제대로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4~5년 전부터 시작했어. 우리가 죽고 나면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겨.” 그래서 그는 스키노미는 미는 끌, 사쿠리는 홈파기 등 일본어로 된 건축 용어를 온전한 우리말로 고치기 위해 각각의 도구에 번호표를 붙여가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절반 정도는 작업을 마쳐 곧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이라며 기대해도 좋단다.
그리고는 황룡사9층목탑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누가 언제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내손으로 황룡사9층목탑을 복원하고 싶어. 문화재 복원이라는 것이 한두 해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복원하다가 쓰러질지도 모르고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더군다나 황룡사9층목탑은 선덕여왕 시절에 건축된 거라 철저한 고증이 어려울지도 몰라. 똑같이 만들려면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도 수차례 다녀와야 할 거야. 하지만 그래도 복원한 다음에 죽고 싶어. 그게 내 마지막 꿈이야.”
우리의 자연으로 만든 한옥이 좋다는 그는 최근 한옥 열풍이 보기 좋다고 했다. 한옥에서 살아야 잔병치레도 없고 장수할 수 있다며. 소나무와 흙 모두 자연이 준 선물로 한옥을 짓는 것이기에,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 전통건축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언젠가는 일반 대중과 장인이 한옥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는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