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김춘식 나주반장
소반에는 우리의 인생이 묻어있다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4호 김춘식 나주반장을 찾은 날, 그는 소반을 들고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찻물을 끓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반을 알고 싶어? 그러면 우리 인생부터 알아야지.” 자그마한 밥상이라는 뜻의 소반은 예부터 손님에게 차와 과일을 대접할 때 사용되었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으로 집 안이나 밖 어느 곳에 놓아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던 것이 서구식 식문화에 밀려 요즘에는 기능적인 밥상보다는 ‘전통적인 멋을 지닌 고가구’로 인식이 바뀌었다. ‘상판’과 ‘다리’로 구성된 기본적인 생활 공예품이 가구로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소반에는 여전히 우리의 삶이 묻어있다.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것이 바로 ‘상(床)’이기 때문이다. 정화수 떠놓고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기도했을 때도 상이 필요했다. 병원 가는 것이 ‘큰일’이던 시절에 상은 의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온갖 경조사에도 상이 등장했다. 백일상, 돌상, 혼례상, 회갑상, 고희상…. 심지어는 마지막 가는 길에도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상’이었다. 소반을 만드는 전통적 기법을 전수받은 장인은 소반장(小盤匠)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소반 제작은 대체로 소규모 가내수공업이었고, 각 지방마다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며 발전했다. 상머리에 소반 제작소의 이름이 붙여지는 것은 시골 장터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생산지에 따라 소반의 특징이 달랐기 때문에 그 고장의 이름이 소반의 고유명사가 되었는데, 나주반, 해주반, 통영반 등이 그것이다. 특히 나주는 예로부터 목물이 성행한 곳으로 나주 읍내에는 이소목방, 박소목방, 선소목방 등이 있었다. 박판구, 우상숙, 장인태 등이 전통을 지켜왔고 현재는 김춘식 선생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작업실. 모서리를 밀어내는 변탕, 끼고 맞추고 골을 파내는 개탕에 쓰이는 도구가 가장 많이 닳아있다.
나주반은 잔손질이 많이 드는 탓에 톱이나 대패보다 칼을 많이 사용한다.
사라진 나주반을 복원하다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5년,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이다. 김락연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운 그는 김락연의 권유로 나주반과 전통목물을 만들었던 장인태에게 가 2년여 동안 나주반과 전통목물 만드는 법을 배웠고 전역 후에는 영산포에 정착하면서 중앙동에 공방을 마련했다. 어깨 너머 배운 재주로 ‘헌 상 고쳐주는 총각’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본격적으로 나주반 제작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나주반을 찾으러 오는 손님들이 ‘여기저기를 거쳐’ 자기에게 오게 되면서부터다. 나주에 나주반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에 부채질을 한 것이다. “햇병아리 시절이었지. 1960년대에 서울에서 나주반을 찾는 사람들이 자주 내려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물어물어 찾아온 사람이 나더라고. 나주반의 대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주반의 특징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는데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본격적으로 나주반을 연구하기 시작한 그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어렵게 찾은 나주반 장인은 이미 노쇠했고, 나주반에 대해 나와있는 책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나주반의 잔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영산포는 물론이고 장성, 문평 등에서 헌상을 고쳐준다면서 나주반을 찾아냈지. 상을 부수고 못질을 하면서 익혔어. 아마 10년 동안 수천 개의 상을 부수고 조립했을 거야.” 그렇게 상을 부수고, 조립하고,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나주반을 연구했지만 항상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 부족함은 아시카와 다쿠미의 <조선소반과 도자문고>를 보면서 채울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나주반에 대한 책 한 권이 없었는데, 그 일본인은 나주반의 특별함에 반해 아버지가 죽어도 돌아가지 않고 그 책을 완성했지. 나도 다짐했지. 사라진 나주반을 다시 만들어내겠다고.” 그의 이런 노력은 1977년에 빛을 발했다. 복원한 나주반 모형으로 광주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사라진 나주반이 환생했다고 신문은 물론 텔레비전 뉴스에도 대서특필되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주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나무를 직접 자신이 선택한다는 김춘식 나주반장.
나무를 보고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철저한 고증과 끊임없는 노력,
나무를 볼 때 제일 행복하다
나주반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만큼 과정도 복잡하다. 백골(칠을 하기 전의 상태)을 만들기 위해 일일이 송곳으로 구멍을 내 40개 이상의 대못(쇠못이 아닌 대못)을 박는다. 잔손질이 많이 드는 탓에 톱이나 대패보다 칼을 많이 사용한다. 재목의 모서리를 밀어내는 변탕, 끼고 맞추는 골을 파내는 개탕에 쓰이는 도구가 가장 많이 닳아있다. 변탕과 개탕 뒤에 옻칠을 한 번 하고 건조하는데, 대략 사흘이 걸린다. 이 과정을 여덟 번 거친 뒤에야 소반이 만들어진다. 장인의 땀과 정성이 가득 담겨 있기에 작은 소반 하나가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나주반의 아름다움은 장식 없이 간결하게,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단아함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상판을 받치는 네 기둥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상판을 깎아 끼워 맞춘 변죽은 상판의 뒤틀림을 방지한다. 여기에 단순한 조각으로 덧댄 운각은 행주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물론 나주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다. 나주반의 재료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버드나무가 주로 사용된다. 느티나무는 통판일수록, 무늬가 많을수록 좋고 은행나무나 버드나무는 옹이가 없고 매끈해야 좋다. 지금도 나무는 직접 자신이 선택한다는 그는 나무를 보고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나무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가족에게 미안한 적도 많았다. “한번은 천만 원짜리 은행나무를 빚을 내서 덜컥 샀어. 은행나무는 말려서 써야 하는 건데, 다 쓰려면 빨라도 4~5년은 걸리는데 나무가 너무 좋은 거야. 결국 빚도 못 갚고 압류까지 들어왔지. 자식들 기성회비도 제때 준 적이 없어.” 그런 욕심이 나주반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춘식 선생이 없었다면 다리가 개의 다리처럼 구부정한 개다리소반(구족반), 호랑이 다리를 닮은 호족반(虎足盤), 대나무 모양인 죽절반(竹節盤), 다리 대신 편평한 받침을 붙인 은족반(隱足盤) 등은 역사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유산’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