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맛에 끌려 시작한 글씨
옛 서울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는 서촌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에서 강병인 대표와 마주했다. 은은한 먹내음이 가득한 작업실 한 켠에 놓인 이 자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강병인 대표. 하지만 어린 시절 그가 글씨를 쓰기 시작한 데는 이 묵향과 사뭇 다른 달달한 꿀 냄새 때문이었다고.
“어릴 적 워낙 시골에서 자라다보니 먹을 것이 귀했고 늘 배가 고팠던 기억이 나요. 그러던 차에 학교 서예부 선생님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거죠. 그때는 선생님들이 부업 삼아 교내에서 양봉을 하곤 했는데, 한창 단맛을 좋아하던 어린 시골소년에게 서예부에 들어오면 매일 꿀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말은 불가항력의 유혹이었어요.(웃음) 그렇게 잿밥 욕심에 서툰 실력으로 시작한 서예였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게 되었어요. 글씨를 쓰기 전, 벼루에 먹을 가는 시간 동안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글씨를 쓰기 시작하며 늘어가는 실력에 칭찬을 받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나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점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죠.”
한글의 참멋을 찾아
대학 졸업 후 출판물 디자이너로 일하다 새로운 창작의 길을 찾고자 방문한 이웃나라 일본에서 강 대표는 그간 써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글씨와 만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국내에는 단순히 글씨만을 이용해 광고나 출판물의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생소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일본에선 이른바 ‘상업서예’라 해서 가게의 간판, 제품의 상호 등에 저마다 가진 고유의 성격을 담아 재밌고 특색 있는 글씨로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더군요. 이거다 싶었죠. 궁체, 판본체라는 두 가지 대표적인 서체만을 가지고 이어져 오던 그 당시 우리 전통서예의 틀에서 벗어나 전 인류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소리 문자로 손꼽히는 우리 한글의 멋을 제대로 살려보자는 생각에 그 길로 한국에 돌아와 시작하게 된 것이 우리말로는 ‘멋글씨’라고 부르는 바로 이것, 캘리그라피예요.”
모두가 공감하는 두 글자를 위해
이렇게 시작한 강 대표의 캘리그라피 작품들은 이제는 TV나 영화에서부터 술병, 책 등 우리 주변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다. 몇 해 전, 이 땅의 직장인들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남기며 신드롬을 몰고 왔던 웹툰 원작의 인기드라마 <미생>의 메인타이틀 또한 그의 작품이다.
“드라마 타이틀은 그 작품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나 그를 연기하는 배우보다도 대중들이 먼저 접하는 드라마의 얼굴이기에 무엇보다 신중해야 해요. 하나의 드라마에는 그 이야기를 만든 원작자, 그것을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연출자, 이야기 속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 등 서로 다른 여러 객체가 연관되어 있죠.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모인 각기 다른 인물들이 가진 공통된 생각을 담아 그것에 창작자인 저의 감성까지 보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상적인 글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글씨의 ‘멋’ 만을 살려 일필휘지로 써내는 글씨는 겉보기엔 그럴듯해도 속은 비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단 두 글자였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했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삶을 투영한 수단, 편지
손으로 쓰는 글씨에 감정을 담아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강 대표가 가진 글씨에 대한 신념과 어느덧 일상에서 추억이 되어가고 있는 손편지가 가진 감성은 어느 정도 일맥 하는 부분이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캘리그라피 수업을 해오고 있는데 매 강좌 때마다 한 가지 주제로 수강생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거든요. 한번은 ‘우체통’을 주제로 작품전을 열었어요. 모두들 편지, 우체통이라는 주제에 조금은 생소해하면서도 어느덧 진지하게 자신의 감정을 담은 편지를 작품으로 만들더군요. 좀 더 자신을 돌아보며 말하듯이 그린 작품이라 그런지 평소 각자의 서풍과는 전혀 다른 글씨가 나와 수강생들이 모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나요. 이처럼 편지라는 매개는 우리에게 여느 것보다 자신의 모습과 생각이 진하게 담겨 있는 수단입니다. 아무리 빠르고 편리한 것이 좋다지만, 조금 느리고 돌아가더라도 의미 있는 수단인 편지는 인간이 문자를 쓰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태어난 우체국 이야기, ‘우체국과사람들’
16년 만에 ‘디지털포스트’에서 ‘우체국과사람들’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본지의 제호 디자인 역시 강병인 대표의 손길이 닿아 그 의미와 멋을 더했다. “우체국하면 저는 제일 먼저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집배원이 떠올라요. 그래서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을 고객을 향해 달려가는 집배원의 모습을 우체국의 ‘ㅊ’에 담아 봤어요. 한글 모음 중 사람의 모습과 가장 닮은 글자가 ‘ㅊ’이거든요. 여기에 집배원에게 손꼽아 기다리던 소식과 함께 사람 좋은 웃음까지 선물 받아 한껏 기쁜 국민의 밝은 입 모양을 사람들의 ‘ㅁ’에 그려 넣었죠. 이로써 ‘우체국과사람들’에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우정 종사자들과 그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오늘도 우체국을 찾는 대중들의 모습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우리 일상 곳곳에 희소식을 선물하는 ‘우체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껏 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체국과사람들>의 새 출발을 축복하며 끝인사를 전한 강병인 대표.
그의 글씨가 오래도록 대중들의 곁에서 우리 한글의 참멋을 한껏 빛내주기를 소망하며 강 대표의 당부처럼 앞으로도 <우체국과사람들>은 우리 우정의 밝은 소식과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 전하는 ‘또 하나의 집배원’이 되리라 다짐해본다.
Profile
강병인
1962년生,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 석사
2009년 한국출판인회의 ‘올해의 출판디자이너상’
2012년 디자인코리아 은탑산업훈장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tvN 드라마 <미생> 등 다수 방송타이틀 캘리그라피 作
現 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 대표
국립한글박물관후원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