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에서 찾아온 아픔, 그리고 기적
대학 졸업 후 유학길에 올라 이탈리아 베르디음악원을 수료하고 2000년 에스토니아 국립오페라단 무대를 시작으로 데뷔한 그는 이후 단 몇 년 만에 유럽 각지의 콩쿨을 제패하며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 ‘아시아 오페라 사상 최고의 테너’ 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 석 자 앞에 달았다. 거칠 것 없이 무대에 오르며 인생의 정점에서 순항하던 이 천재 테너는 어느 날 믿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2005년 가벼운 감기 증상에 찾은 병원에서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갑상선암 진단을 받게 되고, 이미 성대 신경까지 손상시킨 병마는 수술 한 번에 거짓말처럼 그의 목소리를 앗아 갔다. 좌절의 나락에 빠진 그를 일으킨 건 친구이자 자신의 팬이었던 일본인 음악기획자 와지마 토타로 씨. 토타로 씨는 배 교수의 목소리를 다시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한 쪽 성대의 재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도움으로 배 교수는 일본에서 무너진 성대를 일으켜 재건하는 수술을 받고 토타로 씨와 가족의 응원 속에 재활에 성공, 다시 무대에 올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분들이 보시기엔 기적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될 겁니다. 말이나 할 수 있는 정도로만 회복해도 성공이라던 제가 다시 노래를 하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여전히 한 쪽 성대만을 가지고 노래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성량을 낼 수는 없지만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저와 제 가족, 동료가 흘린 눈물과 노력의 과정을 알기에 저는 기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아요.”
이전에 비하면 아직 3, 4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 성량이지만 무대에 서는 각오와 다짐만큼은 몇 배 이상이라는 배 교수의 말에 그가 마주했던 아픔 속에서 얼마나 지금의 모습을 간절히 원했고 이를 위해 노력했는지 온전히 알 수 있었다.
영화로 다시 만난 나
그가 겪은 영화 같은 인생은 실제 영화로 만들어지며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더 테너 – 리리코 스핀토>는 배 교수의 인생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낸 작품으로 배우 유지태 씨가 분하여 테너 배재철의 아픔과 좌절,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을 섬세하게 연기했다. 이후 세간에 배 교수의 사연이 더욱 알려졌고 영화는 작년 재개봉되며 한 번 더 대중들에게 인간 배재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는 것은 아무나 쉬이 경험할 수 없는 법, 배 교수는 영화 속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소재로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결말이 지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만들어가고 있는 저의 삶을 영화화하기엔 창작에 제한이 많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유지태 씨를 통해 만난 제 모습이 실제보다 더 멋지더군요(웃음). 사실 테너들은 보통 체구가 크지 않은데 훤칠한 용모의 유지태 씨로등장하는 제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실제론 바리톤의 목소리를 가진 유지태 씨가 테너인 절 완벽히 연기하기 위해 1년 넘게성악을 공부하고 제 동작 하나하나까지 연구하는 모습을 보며 큰감사를 느꼈죠.”
대중은 모두 하나
배 교수는 최근 한-일 양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럽을 호령하던 그가 일본으로 활동 영역을 옮긴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와 일본, 가깝지만 참 먼 나라죠. 저 역시 처음 일본에 진출할때엔 한국 테너의 위상으로 그들의 콧대를 눌러주고픈 ‘애국심’에 불탔어요. 하지만 공연을 계속 하면서 그들 역시 제 노래를 들으며 위안 받고 박수 치는 대중이고, 그런 대중들을 정치적, 이념적인 잣대로 나눌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제 노래를 통해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저와 제매니저(와지마 토타로 씨)는 작게나마 함께 노력중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음악가로서 이보다 보람찬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나의 의지만이 나를 만든다
배재철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줄곧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중요시하는 그의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좌절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을 믿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기에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한번 실패하여 주저앉은 사람이 다시 용기에 가득 차 일어나기란정말 힘든 일입니다. 다시는 노래할 수 없을 것이라며 안타깝게 혀를 차는 주위 시선들은 저를 더 괴롭게 했어요. 하지만 노래할 때 행복을 느끼던 내 모습을 기억하기에 좌절 속에서도 저는 이 길을 버리지 않았고, 전처럼 오페라 무대에는 설 수 없지만 다시 노래를 하는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겪었던 힘들었던 과정도 돌이켜보면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믿지 않더라도 나는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안 되더라도, 힘들더라도 할 수있다는 나의 의지만큼은 잃어서는 안 됩니다.”
심장을 꿰뚫는 목소리로 세계를 감동시키던 리리코 스핀토는 역경을 딛고 대중 앞에 다시 서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제 조금은 나지막한 소리로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자 하는 테너 배재철의 앞날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