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어머니의 젖줄
곱게 차려입은 한복에 선한 미소, 국악인 김영임의 첫인상은 그가 내는 소리만큼이나 청아하고 정갈했다. 강산이 네 번 변할 동안 우리의 소리를 지켜오며 살아온 김 명창과 그가 몇 해 전부터 이끌고 있는 아리랑보존회의 청담동 사무실에서 마주했다. 소리꾼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세월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게 소리는 어머니의 젖줄이자 내 인생의 멘토다.’ 예술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편견이 존재했던 과거, 어려서부터 끼와 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어머니를 졸라 시작한 고전무용을 통해 자연스레 국악을 접하게 되었다고.
“젊은 시절 단순히 좋아서 시작한 국악이었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소리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더해지는 책임감과 부담은 여전히 저를 고민하게 해요. 이 자리까지 지치지 않고 살아가게 해준 국악은 제 어머님이 남겨주신 젖줄이자 나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죠.”
방년(芳年)의 소리꾼이 부른 회심곡
1974년,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나 세상을 알아가며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여정과 부모에 대한 소회를 담은 곡인 <회심곡>이 한 신예 여성 소리꾼에 의해 발표되었다. 특유의 구성지고 애절한 목소리는 대중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이 곡을 부른 주인공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이후 이 여성 소리꾼의 정체가 알려지며 대중들을 한 번 더 놀라게 하는데 그가 바로 당시 방년 22세의 김영임 명창이었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었을 나이의 그가 인생이라는 큰 그림에 대하여 애절하게 풀어낸 이 한 곡조는 김 명창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으며 소리꾼 김영임의 화려한 출발을 알렸다. 이후 왕성한 방송 활동과 공연으로 김 명창은 국가대표 소리꾼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는 국악인으로 손꼽힌다. 그가 오늘날의 소리꾼 김영임을 만들어준 <회심곡>에게 더 각별한 애착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
“<회심곡>은 우리의 서울·경기민요를 토대로 한 메나리조의 구슬픈 소리에요. 민요라고 언제나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는 가락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조금은 차분하게 사람의 일대기와 우리 민족이 가진 다소곳한 정서를 표현한 곡이라는 점이 큰 매력이죠.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다른 악기의 반주 없이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표현하다보니 유독 몰입이 빠르며 흡인력이 강한 곡이기도 해요.”
세대를 아우르기 위한 국악의 변모
김영임 명창은 지난 3월 국악인으로서는 파격적이고도 신선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명 ‘쎈 언니’로 불리는 여성 힙합가수 제시(Jessi)의 랩을 얹은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를 발표한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음악 경연 프로인 <힙합의 민족>에서 래퍼 딘딘과 함께 8마디 랩을 구사하며 매주 치열한 경연을 통해 도전적인 모습 또한 선보였다. 힙합과 만난 국악이라, 쉬이 떠올리기 어려운 조합일진대 김 명창은 왜 힙합을 선택했을까?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젊은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는 낯선 음악에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악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다른 음악장르보다 짧은 시간 안에 강하게 어필할 수는 없어요. 다만 단지 흘러가는 대로 국악에 대한 무관심을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힙합 뮤지션들과의 콜라보를 시도하게 된 거죠.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시작한 힙합이지만 대중 여러분의 관심어린 반응과 노력 끝에 완성한 결과물들을 돌이켜보면 정말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40년 넘게 음악을 해오면서 조금은 안주하게 되었을 제 마음도 다 잡는 계기도 되었고요.”
낮은 곳까지 전하고픈 우리의 소리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영임 명창에게 5월은 유독 바쁜 달이다. 어버이날 즈음하여 김 명창의 이름을 내걸고 여는 효 콘서트 준비와 각종 행사, 공연 등으로 밤낮 눈코 뜰 새가 없기 때문인데, 그 바쁜 와중에도 그는 재능기부를 통한 사회 환원 역시 앞장서고 있다. 틈틈이 사회복지시설이나 요양병원 등 자신을 불러주는 곳 어디든 찾아가 무료 공연을 여는 것이 그것이다. 김 명창은 자신의 소리를 대중에게 고루 전하고 싶다는 말로 입을 뗐다.
“공연 한 번에 10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요즘 자녀들의 손을 잡고 공연을 찾아오시는 어르신들뿐 아니라, 우리 주변 곳곳의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저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가락을 전하고픈 게 제 소망이에요. 특히 가정의 달 5월이면 사회의 더 낮은 곳까지 우리 민족의 소리와 정신을 전달하고 싶어요. 제 미약한 노력이 전해져 여러분들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소리꾼이 되어 이보다 더 큰 보람은 아마 없을 테죠.”
오래도록 전해져야 할 숭고한 가락
김영임 명창은 우리 민족의 상징인 아리랑을 연구하며 보존하기 위해 3년 전 아리랑보존회를 열고 본격적인 후진양성을 통해 아리랑 전수와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소리를 널리 알리고자 노력중이다.
“외국인들에게 애국가보다 더 친숙한 우리의 소리가 바로 아리랑이라고 생각해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아리랑의 가락은 단번에 ‘Korea’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우리의 선조들이 남겨준 이토록 아름다운 가락을 지켜내고 더 널리 전하는 것이 제가 마땅히 해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보다 더 많은 곳에서 아리랑 한 곡조를 원없이 불러보고 싶다는 김영임 명창. 우리의 소리가 가진 숭고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 힙합이라는 낯선 발걸음도 주저하지 않는 김 명창의 도전을 나지막이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