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손님
만화가가 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라는 것이라며 입을 뗀 윤태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영감이라는 것이 창작가라고 해서 특별하게 주어지는 감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이든 항상 메모를 해요. 거리를 스쳐가는 사람, 지나가는 상념 등 그 무엇이든 항상 끄적이며 고민하는 습관 속에서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손님처럼 ‘이제는 이 이야기를 풀어내야겠다.’ 라고 떠오르는 게 제가 생각하는 영감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준비되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독자가 덜 수고로운 것이 만화
만화가 가진 특징을 묻는 질문에 윤 작가는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밝혔다.
“만화란 것이 본래 활자 매체보다 독자가 덜 수고로운 매체거든요. 글자를 읽으며 독자가 직접 모든 장면과 내용을 상상하고 떠올리는 소설에 비해 만화가가 그려낸 배경과 상황, 인물의 표정 등을 통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점이 만화가 가진 특성이죠. 이 점은 만화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독자가 누릴 상상의 영역을 어느 정도 제한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 같아요.”
1988년 만화가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윤 작가는 활동 초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소년잡지에 만화를 싣는 출판 만화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는 작가가 독자가 아닌 편집자의 눈에 들기 위해 만화를 그리던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그 협소한 시선들 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가 만화를 그린 지 꼭 20년이 지난 2008년, 더 이상 책장을 넘기며 보는 출판 만화 시장에 독자가 남아있지 않자 그는 과감히 독자들을 찾아 웹툰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후 그는 <이끼>, <미생>과 더불어 최근 영화화된 <내부자들> 등 조금은 강하고 냉소적인 작품 세계를 펼치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웹툰의 장점을 꼽자면 단연 독자들과 직접 소통한다는 점이죠. 작품을 보는 독자들이 직접 전해주는 평가와 의견들은 저와 독자 간의 거리를 좁히고 그에 따라 작품의 방향을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내 책상 위가 나의 세계
누구나 살면서 마주하는 벽, 이른바 슬럼프가 찾아올 때 그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
“누군가는 슬럼프를 마주했을 때 혼자만의 여행을 간다거나, 즐겨 찾는 단골 가게에 들러 일상을 돌아보기도 할 테지만, 매주 독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연재 작가가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가 늘 자리하는 바로 이 곳, 내 책상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해요. 이곳이 제가 봐야할 책들과 자료들이 가장 많은 곳이고, 내 생활의 결과물인 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공간이거든요. 따라서 작품 활동 중이든 일상이든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모든 걸 이 자리에서 고민하고 그것을 풀어갑니다. 여길 떠남으로써 닥쳐온 문제들을 회피하고 흘겨보지 않기에 내 책상 위가 바로 나의 생활이고 저만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어요.”
허구적인 희망과 위로는 이상일 뿐
최근 그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나쁜 기억 지우개> 편에 출연해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로 시청자들의 많은 공감을 샀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위로 또한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대중들에게, 특히 이 시대의 부모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
“저도 두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언제나 드는 생각은 미안함입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자녀에게 늘 최선을 다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말은 어쩌면 허구적인 이상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다만 ‘자식으로부터 면책 받고 싶어 하는 부모는 없다.’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슴 속 감정을 해소하려 하지 말고 끌어안은 채 묵묵히 버티고 고민하는 것, 이것이 제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책은 도리어 자신을 작게 만들 뿐이라는 그는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로서, 나이기에 가치 있는 만화가
윤 작가는 현재 <미생 2>를 연재 중이다. 그러나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휴재를 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미안함뿐이라는 그는, 올해는 스스로를 재생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요즘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재생시켜야만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독자가 찾지 않는 만화가야말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가치 있는 만화가가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윤태호라는 이름 석 자로 신뢰를 줄 수 있는 창작자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그가 그린 작품은 미생(未生)이나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은 미생(美生)이었다. 미생(美生)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그는 자신의 일상이자 세계인 책상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