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의 작성 경위를 살펴보면 이 편지는 백범 김구 선생이 쓰고 싶어서 쓴 편지가 아닌데요, 미군이 서약서를 요청했고,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서한을 제출하고 나서야 중국 주둔 미군으로부터 귀국 항공편을 제공받을 수 있었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미국의 대일 개전 이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대미·대중 교섭을 한층 강화했고, 두 나라를 비롯해 연합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정부 자격을 승인 받는 데 외교력을 집중했어요.
또한,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광복군은 중국 전구(독자적으로 맡아서 전투를 수행하는 구역)와 인도·버마 전구에서 활동하던 미군 전략국(OSS)과 제휴해 그들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을 준비했는데요, 하지만 광복군과 미군의 합동 작전을 위한 공동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연합국들로부터 끝내 정부 자격을 승인받을 수 없었답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찌감치 한반도 신탁통치라는 나름의 확고한 전후 대한정책을 수립한 뒤 그 실현방안을 모색했고, 종전 뒤에도 그 방침은 변하지 않았는데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김구 선생이 귀국한 뒤 자신의 구상에 따라 '스튜의 간을 맞추는 소금'(하지가 1945년 11월2일 참모회의에서 한 말)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을 뿐, 임시정부를 망명정부로 대우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위와 같은 입국 서약서를 받아낸 뒤 귀국을 허용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