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나에게는 무조건 붙잡아야 할 절호의 기회일 뿐이었다. 일년 동안 할 일을 미리 한 몫으로 약속받는 기회가 어디 쉬운가. 그때까지 나는 같은 일을 일년 동안 계속해본 적이 없었다.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일용근로자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늘 그모양이었다. “일을 시켜 주시기만 한다면 제 힘 닿는 데까지“
“그럼 집에 가서 기다려요. 늘 연락이 닿을 수 있두룩, 아니 연락을 하면 금세 이리루 올 수 있어야 해요. 우리 집 바깥어른이 오늘이라도 길을 떠나실지 모르니까 말이우.'
'네. 집안에만 있겠습니다.'
나는 감동하며 대답했다. 부인의 말은 내가 이 집 바깥주인의 여행 수행원으로 채용되었음을 통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화 있수?'
'없는데요. 아직 전화 놓을 처지가 못됩니다.'
그 무렵에는 전화국에 가입신청을 해 놓고는 짜증날 만큼 기다려야 전화를 집안에 들여 놓을 수가 있었다.
'그럼 천상 물력가게를 통해서 연락을 해야겠구만.'
'그렇게 하십시오. 저한테 연락을 주시면 이 사람이 금세 달려오두룩 조치하겠습니다.'
물력가게 정씨가 말했다.
'고마와요. 그런데 가만 있자. 정씨가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거나, 깊이 잠든 밤중에 연락을 취해야 할 일이 생길지두 모르잖아요?'
“염려 마십시오. 제가 볼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게 될 적에는 집안 식구들이 대신 연락을 취하두룩 조치할 테구, 또 아무리 깊이 잠든 밤중이라두 전화 소리가 울리면 지체없이 깨어 일어나 달려가 연락해 드릴 테니까요”
“고맙지만 아무래두 이 젊은이가 오늘 밤부터 우리 집에서 묵는 게 좋겠어요. 딴채에 빈 방이 있거든요”
“편하실 대루 하십시오. 유관중이 이 사람은 오늘부터 시방부터 일년 동안은 이 댁의 심부름 꾼이구 머슴이니까요”
나는 물력가게 정씨의 말에 숭복하듯 잠자코 있었다. 심부름꾼이나 머슴이라는 말이 조금은 색깔이 텁텁하게, 또 조금은 덜 풀린 무거리로 가슴에 와 닿았지만, 못물 속에 떨어진 한 방울 물감인 듯, 여울물 속에 휩쓸려 들어간 한 덩이 흙인 듯 금세 회석되고 풀려 사라져 버렸다.
“그럼 집에 가서 버릴 수 없는 물건,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 가지구 와요.”
부인이 말했다. 나는 누더기가 다 된 이부자리를 가져와야 되나 버리고 와야 되나 갈등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날부터 나는 그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정원 한 귀퉁이 기역자로 꺾인 붉은 벽돌담에 붙여 딴채가 지어져 있었다. 본채에 비할 때 작고 납작하니 초라해 보였지만, 내가 기거하던 자취방에 비할 때는 대궐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호화스럽다고는 할 만했다. 제법 큰방 하나와 작은방 하나, 조붓하지만 수세식 변기와 욕조가 설치된 화장실, 부엌…. 네다섯 식구가 살림을 살아도 될 만했다. 아들을 장가 들여 살게 하려고 지은 딴채일까, 청지기나 안잠자기의 식구들을 위해서 지은 딴채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궁리하다가 이부자리도 가지고 오자고 마음 먹었다. 뜨내기 살림이어서 냄비, 밥그릇, 수저, 갈아입을 작업복 두 벌, 겨울에 덧입을 점퍼 하나, 작업화 한 켤레, 수건 하나, 트랜지스터라디오 하나, 그것들이 전부여서 소용에 닿지 않는 물건을 골라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부인의 말을 생각해서 땀에 절은 모자와 기워 신으려고 꿍쳐 두었던 헌 양말짝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방은 누더기 이부자리를 펴기 미안할 만큼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데다가 향긋한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아무렇게나 늘어놓고 지내던 좁고 우중충한 방에서 별안간 넓고 반듯하고 깨끗하고 밝은 방으로 자리를 옮기니까, 있지도 않은 향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향내는 내 코에 서툴면서도 한편으로는 잊어버렸던 고향 냄새나 되는 것처럼 친근감으로 다가왔다.
향내의 정체는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가지고 온 짐을 큰방에 내려 놓고는 정리하기에 앞서 우선 작은방, 부엌, 화장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현관문이 급하게 열리며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하듯 들어왔다. 아까 물력가게 정씨 따라 이 집에 왔을 때 응접실로 안내해 주던 여자였다.
'내가 쓰던 물건이 남아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귀밑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이 무척 예뻐 보이면서 욕망이 내 가슴벽을 안타깝게 쓸어내렸다.
“그러세요? 내가 너무 일찍 왔나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예요. 깜박 잊어버리구서···”
여자는 지체하지 않고 작은방으로 들어가더니 또 금세 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돌아나와 도톰한 뒷모습을 보이며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도 여자의 뒷모습은 현관문 안에 좀더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잠시 잦아들었던 향내가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처럼 떠서 방안을 맴돌았다. 바람을 일구어 가라앉았던 향내를 휘저어 방안 가득 뿌려 놓고 현관문 밖으로 사라진 여자, 그러나 뒷모습으로 현관문 안에 그냥 머물러 있는 여자는 초희였다. 초희한테서 향내가 풍겨 나왔다. 얼굴 에서, 목에서, 가슴에서, 겨드랑이에서, 그리고 옷에서···. 그러나 그 무렵 밖에서 만난 초희한테 서는 향내가 나지 않았다. 번번이 그랬다. 초희의 향내는 방안 또는 집안에서만 맡을 수 있었고 집밖에서는 맡을 수가 없었다. 화장품을 엷게 써서 바람 센 바깥에 나오면 향내가 흩어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추측은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
“난 외출할 적에는 화장품을 바르거나 뿌리지 않아요.”
초희가 말했다.
“그럼 집안에 있을 적에만 화장품을 쓴다는 거야? 꺼꾸루잖아?’
“난 당신하구 같이 지내는 장소에서만 화장을 쓸 거야.”
초희와 함께 지내던 방에는 향내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초희의 몸과 옷에 바르고 뿌린 화장품 냄새가 방안 공기 속에, 아니 방벽 속에 깊숙이 배어들어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 몸 속까지 스며 들어온 듯 느껴졌던 그 향내는 초희가 세상 떠난 뒤로 차츰차츰 내 코 끝에서 기억 속으로 자리를 옮겨 멀어지고 희미해져 갔다. 이즈막에는 초희를 회상할 때도 향내가 아니라 모습과 음성으로만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나는 초희의 향내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초희의 혼이 향내로 바뀌어 내 몸을 휘감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젊은 여자가 저녁상을 차려다 주었고, 깨끗한 이부자리를 가져다 주었다.
'내일 아침 여섯시에 창문 커튼 틈새로 정원을 살펴보세요. 이 댁 주인어른이 체조를 하실 거예요. 그분의 외모를 잘 익혀 두세요. 사모님이 전하시는 말씀이에요 잊어버리지 마세요”
젊은 여자는 창가로 밀어 묶어 놓았던 커튼을 풀어 창문을 가리고는 방에서 나갔다. 그 움직임따라 방안 공기가 휘저어지며 향내가 내 코끝을 스쳤다. 초희가 내 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향내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넓고 깨끗한 방에서 폭신하고 정갈한 이부자리 속에 누어보았다. 아까워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넓고 깨끗한 방의 분위기와 폭신하고 정갈한 요 이불의 감촉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었다. 혼자서만 누리기가 너무 아까웠다. 초희를 옆자리에 눕혔다.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어딘가 느낌이 익숙치 않았다. 얼굴을 살펴보았다. 초희가 아니라 이 집의 젊은 여자였다. “나 초희예요. 내 몸 속에 초희의 혼이 들어와 있어요.”라고 젊은 여자가 속삭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초회의 향내가 났구나. 나는 초희의 혼이 들어가 있는 젊은 여자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 여자는 내가 아니예요. 당신 벌써 다른 여자를 안아요? 당신이 나를 잊어 버리면 난 너무나 허무해서 구천을 헤매 댕기게 돼요 여보!” 초회의 목소리였다.
나는 젊은 여자의 몸을 감았던 팔을 풀어내면서 문득 정신을 차렸다. 꿈이었다. 어둠이 가득 들어 찬 방안은 밤의 허공이었다. 그 허공을 떠도는 초희의 혼이 움직이면서 일으키는 바람이 내 이마와 볼에 와 닿은 것 같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전등을 켰다. 네 벽이 반듯하게 선 넓은 방이 휑하니 드러났다. 어둠 속에 가득 들어 차 있던 기운이, 여자의 몸을 만들어 내 품에 안겨 주고, 목소리를 만들어 내 귀에 들려 주던 기운이 말끔히 가셔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돌아와 전둥을 끄고 다시 이불 속에 누웠다. 잠시 뒤 본채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이어서 전선을 통해 묻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본채에서 대문 쪽으로 옮겨가는 발소리가 뒤따랐다.
“늦으셨어요”
안주인의 목소리.
“회의가 있어서.”
바깥주인인 듯한 남자 목소리.
“그래서, 출발하실 날짜는 정하셨어오?’
“제직들이 그 일을 위해 기도하구 있으니까 오래잖아 정해지겠지.”
나는 재빨리 이불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갔다. 커튼자락을 살짝 젖히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본 채 현관 천정에 매달린 외둥이 뽀얀 빛을 뿌려놓은 정원에서 나란히 선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바깥주인의 키가 안주인에 비해 목 하나는 더 크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었지만, 바깥주인의 생김새를 가려볼 수는 없었다. 나는 주인 내외가 본채 현관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뒤쫓은 다음 이불 속으로 돌아와 누웠다. 아직도 여섯시간을 더 잘 수 있다는 사실이 잠시 내 가슴에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이 집 바깥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 동안 수많은 대장 밑에서 일해 보았다. 나를 고용하거나 지배 통솔하는 사람이 대장이었다. 나는 일단 대장을 정하면 대장의 뜻을 헤아려 그 뜻에 맞도록 충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불화를 빚는 경우는 없었다. 있다면 일방적으로 내가 꾸중을 듣는 경우였다. 그러나 대장의 됨됨이는 천차 만별이었다. 그 밑에서 지내기 편한 대장이 있었고. 비위 맞추기에 까다로운 대장이 있었고, 무정하거나 냉혹하기까지 한 대장이 있었다. 그러나 지내놓고 생각해보면 후덕하거나 마음씨 너그러운 대장이 이것저것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씨 너그러운 대장 밑에서 대장을 칭송하며 마음 편히 일했지만 지내놓고 보면 배운 일이 없는 경우가 있었고, 너무 심하게 아랫사람을 닥달 하는 대장을 만나 늘 마음 졸이고 원망과 미움을 가슴 속에 키우며 일했지만, 지내놓고 보면 많은 일을 배웠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꾼들은 새 대장을 만나면, 강한 짐승 앞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약한 짐승처럼 경계심을 품으며 새 대장의 인상에 신경을 갈아세우곤 했다. 무던해 보이거나 경우가 바르게 보이면 일꾼들의 얼굴색도 밝아지고 말소리도 부드러워지지만, 새 대장의 인상이 심통 사나워 보이거나 깐깐해 보이면 일꾼들의 얼굴색도 굳어지고 말소리도 뻣뻣해지곤 했다.
“우거지쌍통하구, 잔소리깨나 씹어뱉구, 신경질깨나 부리겠구만···.”
“생트집이나 잡지 않으믄 다행이겠구만.”
일꾼들이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투덜거리면서도 맞닥뜨린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표시였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운명에 얽어 매어진 쫄짜 신세인 것을.
진항우씨는 인력시장에서 인연을 맺은 대장이었다.
'미장일 할 줄 아는 사람 나와.”
해뜨기 전의 써늘한 바람을 휘저어 놓은 걸쭉한 외침을 따라 일꾼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틈새에 나도 끼어들었다. 나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을 적마다 미장일을 배워서 썩 익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지간히 할 줄은 알았다. 다시 말하자면 큰 작업을 나 스스로 계획을 세워가지고 해 나갈 만큼은 되지 못했지만 작은 일이면 엉터리란 소리 안듣게 할 수 있었고, 큰일도 설계가 되어 있거나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대충 일러 주면 틀리지 않게 해 놓을 수가 있었다.
“당신들 정말 미장일 할 줄 알아? 미장일은 막일과 달라. 미장이는 기술자란 말야.”
열댓명이나 모여든 미장이들을 눈알을 굴려 살 펴보며 그렇게 말한 사람이 진항우씨였다. 목소 리는 걸쭉했지만 갈쿠리가 여기저기 돋아난 쇠방 망이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상하좌우로 좁은 이마 때문에 머리통보다 아랫볼이 더 넓고 커보이는 거무튀튀한 얼굴이, 핏줄이 얼기설기 드러난 동그란 눈과 땀구멍이 숭숭 뚫린 주먹코와 말할 때 이빨이 튀어나오는 큰 입으로 해서 엉큼하고 심통 사납겠다는 느낌을 대하는 사람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게다가 굵고 짧은 목, 두껍고 넓은 어깨, 튀어나온 가슴, 통나무 같은 허리는 힘을 뭉친 덩어리여서 그의 인상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위압감을 느꼈음인지 일꾼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마치 미장일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잘못 듣고 오기라도 한 듯한 얼굴 표정을 꾸미고서.
“그럼 누구를 찾는 중 알구 쫓아온 거야? 즈 아버지가 아들 찾는 걸루 알아 듣구 쫒아왔대는 거야? 아버지가 몇명이나 되기에 즈 아버지 목소리두 제대루 구별하지 못하는 거야? 암캐 아들같은 놈들.”
진항우씨는 가래침 긁어 뱉듯 말을 뱉어내고는 남은 일꾼들을 다시 핏줄 선 눈알을 굴려 살펴보았다. 살펴보기보다는 숫자를 헤아려보는 것 같았다. 반도 더 빠져나가 드문드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꾼은 나까지 일곱명이었다. 다른 여섯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알 수 없어도 내 생각은 뽑아 준다면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장이 심통 사나워도 꾀부리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는가. 또 내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몸집과 힘에서 나도 그와 견줄 만하거니와 나이로 따지면 그보다 훨씬 젊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는 덩치는 큰데 왜 그렇게 겁이 많으 냐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교도소에 몇차례 드나들고 난 뒤로 그 겁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나의 교도소 경력이 이력서와 신원증명서를 내야 하는 일자리에서는 쓸모없는, 아니 방해물일 뿐이었지만, 신원증명서가 필요없는 막일터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막일터에서는 법이나 예절이나 도리 따위를 완력과 깡다구가 짓밟아 뭉개기 일쑤였다. 또 완력과 깡다구가 서로 맞서서 싸운다면 힘이 좀 모자라더라도 깡다구가 이겼다. 악착같게 버티는 찰진 끈기에다가 자기 살 속으로 칼끝을 푹푹 찔러 넣어 낭자하게 피칠을 해대며 함께 죽자고 달려드는 깡다구한테 완력은 맥을 못추었다. 그러나 나는 완력과 깡다구를 겸한 인물인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깡다구를 증명하기 위해 칼로 내 살을 찔러 피칠갑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슴팍에 새긴 호랑이 대가리 문신과 팔뚝, 허벅지에 남은 칼자국 상처만 슬쩍 내보여도 웬만한 사람은 움찔했지만, 거기에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교도소 출입 경격을 보태 놓으면 웬만한 완력과 깡다구도 꼬리를 사리곤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무렵 나는 그토록 기피하고 싶어했던 신원증명서를 발부받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나의 교도소 경력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초희를 만나 함께 살게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일곱명 다 따라와.”
진항우씨가 말했다. 미장이 일곱 사람은 용달차 짐칸에 실려 일터로 갔다. 삼층집을 짓는 공사였다. 기초는 이미 다져졌고 그 위로 일층의 철근 기둥들도 세워져 기둥 사이에 벽을 쌓는 일부터 시작했다. 시멘트 블럭을 쌓고 그 겉을 시멘트로 바르는 일이었다. 물론 바닥도 안벽도 천정도 싸발라야 했다. 한데 진항우씨의 못된 근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멘트를 너무 많이 섞는다고 했다가 또 너무 적게 섞는다고 꾸중을 했고, 밥 먹고 나서 쉬는 시간, 담배 피우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잔소리를 했고, 꾀를 부려 일의 진도가 늦어진다고, 또 일솜씨가 서투르다고 호통을 쳤다.
“일하는 거 보니 기껏 보조 노릇이나 했구만. 진짜 미장이 될래믄 아직 멀었어. 일 거칠어서 손해, 일 더뎌서 손해, 나 혼자 책임을 떠맡을 순 없잖아. 품삯 제대루 받을래믄 제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오구, 제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들어갈 생각해. 알아들었어 못알아들었어? 못알 아들었으믄 낼부터 일하러 오지 말아. 이 정도 일꾼이믄 더 싼 품삯에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진항우씨는 시간을 더 늘여 일을 시켰고, 다리를 삐어서 쉬는 막일꾼 대신 막일 할 사람을 구해 오지 않고, 미장일 하는 사람들한테 번갈아 막일을 시키곤 했다. 트럭에서 시멘트 부대 져내리기, 블록 · 자갈 · 모래 · 시멘트를 공사장 이층 삼층으로 져 올리기 따위였다.
“난 월급 타면 고만두겠어. 아무리 공사판 일꾼 처지지만 이렇게 대접받을 순 없잖아? 행동통일을 해서 본때를 뵈 주자구.”
어느날 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김씨 성 가진 미장이가 말했다.
'행동통일을 할 수만 있다면야 그 작자 정신이 번쩍 들겠지. 첫 월급 탄 다음날부터 안 나오기루 약속을 하구 지켜야 해. 난 약속하겠어. 어때 거기들?’
이씨 성 가진 미장이가 부추기고 나섰다.
“좋아. 나두 약속했어.”
'나두야. 깐눔의 것.”
나만 빼놓고 여섯사람 모두 찬성했다.
“거기, 유씨는 어때?’
김씨가 내게 물었다.
“난 그냥 견뎌보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동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일을 두고 초희와 이미 의논을 한 터였다.
“난 그 자식을 때려 눕히구 거기서 뛰쳐나오구 싶어.”
“참구 견뎌요. 기껏 석달이면 일이 끝난다구 했잖아요? 참을 인자 세번이면 살인두 면할 수 있다구 했어오 당신은 참구 견디는 훈련을 쌓아야 해요. 그래야 부모님한테 진 빚을 갚구 당신두 정말 새 사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참구 또 참아요. 참기 어려울 때는 부모님과 내 얼굴을 눈 앞에 떠올려보세요, 그렇게 하겠다구 약속하세요 ”
“알았어.”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일터에 나와 일하다가 울뚝불뚝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초희의 그 말을 생각하고는 애써 참아냈다. 김씨와 이씨의 제의에 마음 속으로는 따르고 싶으면서도 반대되는 대답을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었다.
“유씨, 어디 가믄 이 따위 일자리 못얻어 가질 까봐 그래? 게다가 유씨는 아직 나이두 젊잖아? 못된 놈들한테 덮어놓구 굽실거리다간 그 놈들 기만 살려 줘서 일꾼들을 종으루 여기는 버르장 머리가 아주 굳어버린다구.”
“난 사정이 있어서요 솔직하게 말씀 드린다면 아버지와 약속을 했어요 이번 일자리를 얻구 나서 일자리 구했다구 말씀 드렸더니 무슨 일이 있더래두 일이 끝날 때까지 일자리를 옮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구 하셔서 그렇게 약속을 했어요. 그 동안 내가 일자리를 너무 자주 옮겼거든요. 일하다가 조금만 맘에 들지 않아두 집어치워 버리군 해서 늘 아버지 꾸중을 들었어요”
나는 꾸며서 대답했다.
“아주 못된 대장한테 걸려들었다구 아버지한테 말씀 드리믄 알아들으실 텐데 뭘. 그 눔 그냥 못되기만 하지 않구 도둑질두 하더라구. 시멘트 너무 많이 섞는다구 지랄하는 게 냄겨서 팔아 먹을 속셈에서 그러더라구.”
“그 동안 내가 아버지한테 너무 많이 핑계를 대서 믿어 주시질 않아요 이번에두 중간에 일을 고만두면 부자지간의 의를 끊겠다구 야단을 하시니 어떻게 해요? 미안해요. 행동통일에 방해가 돼서. 난 없었던 걸루 생각하세요”
'할 수 없구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월급날이 되었 는데, 김씨 이씨 두 사람한테만 정해진 액수대로 지불되고 나머지 다섯 사람한테는 반액만 지불되었다. 들어올 돈이 들어오지 않아 며칠 뒤에 지불하겠다고 했다. 떨떠름했지만 어쩔 수 없어 우물쭈물 서 있는데, 진항우씨가 김씨, 이씨, 두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당신들 둘은 낼부터 나오지 말아. 당신들이 여기서 일하기 싫으믄 당신들이나 고만두지 왜 다른 사람들까지 충동질을 하는 거야? 내 성질에 이 정도루 마무리짓는 것만 다행으루 알아. 나두 성질 많이 죽었지. 그전 같으믄 뼈다귀 성해서 떠나지 못해. 꺼져. 빨리!”
날벼락 같은 진항우씨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미장이들이 서로서로 눈길을 주고 받더니 갑자기 내게로 몰려왔다. 그들의 눈빛에는 의심이 잔뜩 배어들어 있었고, 곧 이어 의심은 모멸과 증오로 바뀌었다.
“유씨, 아니, 유가야. 나 좀 봐.”
김씨가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진항우씨를 찾았다. 진항우씨가 이 일을 해명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번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항우씨는 잠깐 뒷모습이 보였을 뿐 저 앞 집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나는 김씨에게 끌려 공사장 뒤쪽 공터로 갔다. 다른 미장이들도 우루루 따라왔다.
“이 새끼야. 너 대장 처조카라두 되니? 떠나기 싫으믄 잠자쿠 남아 있으믄 되지 왜 고자질이야? 남 짓밟구 대장한테 아첨 떨믄 금덩어리래두 생길 줄 아니?’
김씨가 눈을 부라리며 다그쳤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난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나는 되도록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대꾸했다.
“그럼 누가 고자질을 했다는 거니? 우리끼리만 있을 때 그 얘기를 했는데 대장이 어떻게 그 일을 알았느냐구? 대장 귀는 천리 밖에서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두 듣는 귀신 귀니? 뭐 이런 새끼가 있어. 이런 새끼가 있으니까 못된 대장이 활개를 치는 거야. 이런 새끼부터 버릇을 고쳐 놔야 돼.”
이씨가 말하며 팔뚝을 걷어붙였다. 다른 미장이들도 합세하려는 듯 주먹을 움켜쥐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왜들 이래요? 난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당신들이야말루 생사람 잡지 말아요”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구 고자질한 까닭을 말해. 그러지 않으믄 니 몸이 성해서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들은 간격을 벌려 나를 둘러쌀 태세를 취했다. 변명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개 일 듯 머리 속에서 일었다. 나는 몇걸음 물러서며 재빨리 웃통을 벗었다.
“고자질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 가운데 있어. 그래두 나한테 행패를 부리겠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어. 솔직하게 털어 놓으라구? 그래, 털어 놓지. 난 열아홉살 때부터 폭력배루 몰려 일곱번을 감방에 들어갔었다. 인제 좀 맘 잡구 조용히 살아 갈라구 하는 판인데 또 내 맘을 들쑤성거려 놔? 내가 또 한번 감방에 들어가면 우리 아버지가 다시는 아들루 여기지 않겠다구 하셨는데, 그렇다구 내가 억울하게 누명 쓰구 얻어 맞아두 참구 견딜 만큼 성인군자가 돼 있지는 못해. 까짓거 감방에 한번 더 들어가지 뭐. 자 덤벼들어. 대가리가 터져두, 창자가 뚫어져두 나 원망하진 말아.”
나는 어깨와 가슴과 팔의 근육을 한껏 부풀려 보이며 말했다. 그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다.
“나는 대장이 나쁘다구 하구 또 모두 여기를 떠나자구 말을 모았는데 유씨만 외톨이짓을 하니까 우린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만 고자질 안했으믄 됐어. 그런데 왜 월급은 반밖에 안 주지?“
김씨가 우물거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떠나겠다구 했으니까 못가게 붙잡느라구 수단을 부린 걸 테지 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들 가운데 고자질한 사람이 있을 테니 찾아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초희의 얼굴이 눈 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났다. 집에 가서 그 일을 초희에게 말했더니 잘 참아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의 충돌사건을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렸다.
김씨와 이씨가 가버린 뒤 나머지 미장이들은 남아서 일을 계속했다. 진항우씨는 월급을 미끼로 해 나머지 미장이들을 잡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진항우씨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였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진항우씨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나에 대해서였다. 다른 일꾼들한테는 여전히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굴면서 나를 대할 때면 알게 모르게 부드러운 기색을 내보이곤 했다. 꾀 안부리고 일하는 나의 자세가 마음에 든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데, 어느날 그 가 다른 미장이들과 좀 떨어져서 일하고 있는 내게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유관중이, 자네 대단하더구만.”
“예? 뭐가요?”
“자네 혼자 여섯놈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대믄서?”
“무슨 말씀이신가요?”
“자네 웃통 벗어버리니까 중량급 레슬링선수 같더라던데? 교도소엔 왜 들락거렸지?”
“어떻게 아셨지요? 그 자리에 대장님은 안계셨는데요?”
'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자네 내 맘에 들었어. 나랑 쭈욱 같이 일하세. 섭섭지 않게 대접해 줄 테니까.”
“그럼 김씨와 이씨의 반란 모의를 대장님한테 고자질한 게 누구지요? 그 사람 때문에 자칫 난 맞아 죽을 뻔했잖아요?”
“알구 싶은가? 자네는 인제 내 사람이나 다름 없으니까 얘기해 주지. 다른 사람들한테 말 전하지 않겠다구 약속할 수 있나?”
“예 약속하겠습니다.”
“나한테 그 일을 알려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루 이씨였다네.”
“예? 어떻게 이씨가···?”
아침 여섯시 십분 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일 텐데도 빛은 커튼을 뚫고 방안에까지 들어와 어둠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늦은봄이니까 해는 길어질 대로 길어져 있을 것이다. 새소리가 창을 토닥토닥 쪼았다. 나는 기지개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옷을 주워 입고 이부자리를 개켜 방 한옆으로 옮겨 놓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고 볼일을 보았다. 여섯시 일분 전이었다. 나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살짝 젖히고 외눈으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풀과 나무와 꽃과 바위가 밝은 표정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 정원이 비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본채 현관문이 열리며 트레이닝 복장을 한 늙수그레한 남자가 밖으로 나와 충충대를 밟고 정원으로 걸어 내려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