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딱 젖어 들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해자의 가슴은 철렁했다.
급류에 휩쓸린 효천이 떠올라서였다. 불같이 화를 낸 것은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정에게 털어놓지 못한 효천의 이야기에 심사는 복잡했다. 이제 와 돌이키자니, 별것도 아닌 것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홀로 끌어안고 있었을까.
들키면 안 되는 일처럼 덮고 또 덮었다. 한번 덮기 시작한 일을 들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의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되는 일처럼 고욕이다. 아들이 캐묻지 않으니 입을 다무는 일은 수월했다. 그대로 묻힐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랬음에도 해자의 세월은 그렇게 불안 속에 위태롭게 흘러왔던 것이다.
“네 아빠는 가고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내 뱃속에는 네가 있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상태였어. 시집도 안 간 딸이 임신한 것도 놀랄 일인데, 유복자를 낳게 생겼으니 집에선 난리가 났지. 뱃속의 아기를 포기하기를 바라셨다. 결혼한 것도 아닌데 아빠도 없는 애를 낳아서 어쩔 거냐고……. 막막했다. 나 역시 애를 낳아 키울 자신은 없었거든. 그렇다고 뱃속에 든 애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는데, 그 사람의 아이까지 잃고 싶진 않았거든.”
지난날을 고해하듯 해자는 털어놓았다. 우정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대면하지 못한 채.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빈 벽에 시선을 꽂아두고서였다.
해자는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보기만 하면 병원에 가자고 잡아끌었다. 끝내는 가슴을 치고 땅을 쳤다.
간호사 딸을 자랑삼던 부모에게 해자는 쉬쉬해야 할 부끄러운 딸자식이 되고 말았다.
“불효막심한 자식이었어. 죄송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그분들을 눈앞에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야말로 야반도주를 했지. 갈 곳도 없었으면서. 부모와 절연하면서까지 나는 내 아이를 선택했다.”
해자는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척했다. 비밀에 부쳤던 일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녀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우정과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는 우정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침묵이 꾸역꾸역 흘러들었다.
“후회되세요?”
잠자코 있던 우정이 물었다.
“너를 선택한 것 말이냐? 아니면 내 부모와 절연하고 산 것 말이냐?”
여전히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그 순간, 우정은 바늘에라도 찔린 듯 움찔했다. 해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아들마저 도시로 나가고 해자는 철저하게 혼자가 된 것이다. 의지할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이.
“왜 그러지 않으셨어요? 얼마든지 새 삶을 꾸릴 수
있었잖아요.”
가시가 박힌 말이었다. 그러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은 엇나간 아들처럼 시비조였다. 우정을 바라보는 해자의
눈길엔 안쓰러움만 가득이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팔자나 고치는 건데…….”
해자에게 관심을 두었던 남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정을 아들처럼 여겨주던, 남자는 꽤나 있었다.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해자였다.
여자 혼자 애를 낳아 키우는 일에 대해, 해자의 인생에 대해 우정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해자는 그냥 엄마일
뿐이다.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빈말을 해 본 적 없고, 아빠 있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 적도 없었다. 무디고 무심하기만 한 아들. 그래서인지 몰랐다. 엄마가 여자라는 사실도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은 깜깜이었다. 불현듯, 당신은 참 이기적이라던 정연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리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우정은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내 정연의 빈자리는 크고 살아갈 날들은 막막했다. 정연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해자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퍽퍽한 삶을 홀로 고단하게 건너왔을 터였다.
우정은 해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가의 굵은 주름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콧등에도 굵은 주름이 터를 잡은 지 오래였다. 염색한 검은 머리는 아직도 일이 필요한 해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일 터였다. 늙음이 서러운 게 아니라 일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 젊어 보여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뭣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 백발을 가리게 하고 해자를 일터로 내몬 장본인이 우정 자신임에야 입이 열 개라도 침묵해야 했다. 억울하다면 억울한 인생의 해자였다. 한 번쯤 아들을 원망할 만도 했다. 아니었다.
“희어진 게 어디 머리뿐이겠느냐. 지난날 기억도 희어진 거지. 내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테지. 나라고 내 인생이 왜 두렵지 않았겠어. 남편 그늘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 끼니를 건너뛸 망정 남 밑에서 네가 눈치 보며 자라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나 또한 너 때문에 누구 눈치 보며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혼자 산 거? 너 때문이 아니라 실은 나 때문인 거야. 널 낳은 걸 후회하느냐고? 전혀. 너를 낳은 내 선택에 대해서만큼은 맹세코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어. 네가 없었다면 내 사랑도 없는 거지. 김효천. 그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도, 내 청춘도 없는 거지. 내 사랑과 청춘의
기록이 내게는 너인 거야.”
“견디기 힘들었으면서…….”
“너를 낳은 순간은 기뻤고 너와 살면서는 행복했다.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해자는 얕은 한숨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녹록치 않은 삶.
선택한 것이었기에 버텼다. 누구를 탓할 수 있지 않았다. 이제와 돌이키자면 미소는 절로 지어졌다. 다 지나온 생. 기쁨으로
점철되던 순간들은 확실히 있었다. 순진무구한 아들의 재롱을 보면 고단한 마음도 녹아내렸다. 고사리 손으로 만져주는 어깨로 행복이 내려앉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아들은 친구도 되었고 해자의 일을 도와줄 때는 듬직했다. 그렇게 의지하며 견뎌온 생이다. 아기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애 아빠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정이 집배원이 되어 나타났을 때, 해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음을 실감했다. 김효천. 우정의 모습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빼다 박았다. 어딘가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일찌감치 네 아버지는 누구라고 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나마 그리움을 채울 수 있게 말이다.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해갈할 수 없는 그리움을 떠안게 될 터였다. 신기하게도 해자의 그런 마음을 알았던가. 우정은 제 아버지를 찾지도 묻지도 않았다. 아빠 있는 친구가 부럽지 않느냐고. 언제가 한 번은 해자가 은근슬쩍 물어본 적도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우정은 씨익 웃기만 했다.
“애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기뻐했겠지? 말해줄 참이었는데……. 효천 씨, 당신도 보고 있죠? 당신 아들이 당신처럼 집배원이 되었는데……. 야속한 사람. 내가 걱정되지도 않았어요? 당신 아기가 궁금하지도 않아?
그렇게 급작스럽게 가버리다니.”
해자는 벽에 대고 멀뚱히 원망을 털어놓았다.
야반도주한 해자는 효천의 고향마을을 찾았다. 효천의 생가를 찾아갈 용기는 없었다. 당신 아들을 잡아먹은 여자라고 또 무슨 소리라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남편 잃은 과부로 살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아는 효천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해자만의 비밀로 간직한 채. 아버지 복이 없는 아이는 조부모 복도 없었다.
언젠가는 털어놓게 될 비밀이었지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급류사고가 아니었더라도 효천은 단명했을지 모를 일이다.
손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도 전에 효천의 부모가 세상을 뜨고 만 것을 보면.
“네 아버지의 기운을 네가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 나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마을 어르신들을 통해 간혹 주워들을 수 있었지. 살아있는 것처럼 반가웠어. 그 사람이 어떤 아이였는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눈앞에 없는 사람이지만 마을을 거닐자면 내게는 곳곳에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네가 집배원이 되었다고 했을 때는 놀라 죽는 줄 알았다. 네 아버지와 같은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 건가. 혹시 네 아버지의 운명까지 닮게 되는 건 아닌가. 혼자서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
눈시울을 찍어 누르는 해자는 목이 잠겼다.
“관두겠다고 했을 때는 왜 또 말리셨어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힘드셨을 텐데…….”
“그 일을 네가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지. 운명 같더라. 관두겠다고 했을 땐 또 서운하고…….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더라고.”
해자는 말끝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우정이 집배원이 됐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화를 냈다. 집배원을 관두겠다고 했을 때는
더욱 화를 냈다. 집배모를 쓰고 대문을 들어서는 우정은 그대로 효천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섬뜩섬뜩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효천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었으면 했다. 마음처럼 되는 일은 아니었다.
효천이 급류에 휩쓸리고 해자는 강가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집배모를 품에 안고 그녀의 발길은 움직일 줄 몰랐다.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그저 망연자실했다. 비바람이 치고 눈발이 휘몰아쳐도 가야만 되는 사람이었다. 행랑 안에 든 편지를 조금이라도 빨리 기다리는 이들에게 전해야만 되는 사람.
목숨의 위협까지 무릅써가면서. 미련한 사람. 해자는 야속한 듯 중얼거렸다. 우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효천의 아들이었다.
우직함을 그대로 닮아, 맡은 일을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행랑을 자전거에 싣고 달리는 우정은 살아 돌아온 효천과 다름 없었다.
“이제라도 네게 말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해자는 가슴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뽑아낸 기분이었다. 우정을 길게 마주할 수 없는 그녀는 일어나 치마를 털었다. 우정을 홀로 남겨두고 방문을 나섰다.
멍하니 앉아있던 우정은 장롱 문을 열었다. 그가 기억하는 뭔가가 있을 터였다. 효천의 집배모. 그때는 무슨 모자인지 알지
못했다. 모자를 쓰면 중학생 형들처럼 멋있어 보였다. 커서 헐렁한 모자를 쓰고 자랑스럽게 동네를 누비던 그날. 우정은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 그깟 모자가 뭐라고. 화내는 해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날로 모습을 감췄던 아버지의 모자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해자의 장롱 안에 그대로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온몸에 바르고서.
우정은 뭉클함이 올라왔다. 효천이 자란 그곳에서 우정이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효천처럼
집배원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효천이 자란 곳에서 우정 또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효천의 일상이 우정의 현실이 되고 효천의 인생 전부를 닮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그마치 이십 년. 우정은 자신의 일이 해자를 위한 선택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전혀 아니었다. 아버지 김효천의 존재가
은연중 우정에게 영향을 미쳐서였다. 집배원이 되었던 게 효천의 생각까지 닮아서였다는 것에 이르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집배원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집배원이 되었고 고향의 파수꾼 노릇을 자처했다.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라 믿었다.
외출이 힘든 이웃을 위해 심부름을 해주고, 농사일에 바쁜 빈집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고, 컴퓨터의 보급과 더불어 사용을 전수하고 그 일들이 우정은 즐거웠다. 모두가 자신이 좋아서 했던 일들. 아버지 효천의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어서라고는, 효천의 삶을 잇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라도 아버지 효천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우정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머니…….
효천의 그림자가 아로새겨진 곳에서 홀로 외로웠을 것이다.
우정은 이른 나이에 떠나버린 아버지 효천보다 어머니 해자가 더 측은하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다음날, 우정은 꼭두새벽부터 하리를 깨웠다. 첫 기차를 탄다고 해도 출근 시간에 맞추기는 늦었다. 그럼에도 우정은 상경을 서둘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유쾌한 얼굴을 하고서. 해자가 바리바리 싸놓은 반찬과 짐 보따리들을 챙겼다.
“ 이게 다예요? 줄 거 또 없어요? 우리 간 다음에 빠뜨렸다고 전화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요, 어서?”
우정은 정신 사납게도 재촉해댔다. 그만 좀 하라고 하리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대문을 나서서 기차에 오르기까지, 우정은 말을 쉬지 않았다. 요양병원은 안 된다. 농사일은 해도 좋다.
그것도 힘들지 않을 만큼이다. 심심해서 하는 소일은 용돈벌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엄마가 왜 그렇게 할머니를 챙겼는지, 이제 알 것도 같아.”
손을 흔드는 해자가 점처럼 작아졌을 때였다. 하리는 팔짱을 끼고 우정을 건너다보았다. 우정은 차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둘만 있게 되자, 우정은 다른 사람처럼 돌변해 있었다. 수심이 그득한 얼굴로 상념에 빠져있었다.
“아빠 덕분에 결석이란 걸 다 해보네. 난 그렇다 쳐도 아빠는 우체국에 전화해줘야 되는 거 아냐?”
하리는 곁눈으로 우정을 살피며 말했다.
“기분이 묘해. 학교에 갈 시간에 기차 안에 있다는 게. 완전 색달라. 아, 빠?”
“…….”
우정은 차창으로 멀어져가는 고향을 눈에 담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고향의 모습이었다. 지금껏 몰랐던 아버지의 존재가 마을 곳곳에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아침 해가 들녘을 물들이며 솟아나고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던 아버지의 존재가 우정의 마음에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한동안 없던 정연의 이메일은 그날 밤에 도착해 있었다.
이사 오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쓴 메일이었다. 새로운 생활에 설레는 한편 혼자인 해자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우정에겐 하나마나한 잔소리처럼 들리는 내용이 유난히 많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들인 나보다 당신이 낫군. 어머니에게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
이제부터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몇 개월 만에 다시 받게 된 정연의 메일에 우정은 빙그레한 얼굴이 되었다. 슬픔은 독하지 않았고 그리움은 슬프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였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함께.
우체국 동료 하나가 행복배달사업을 진행한다는 한마디를 툭 던져놓고 갔다. 영미와 함께 직원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행복배달사업? 그게 뭔데?”
우정은 확인 차 물었다.
“농어촌 주민들을 위해 민원이나 노인돌보미 등의 복지서비스에 집배원들을 활용하겠다는 거야.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의 생활 실태 파악도 하고 재해나 범죄예방 등의 활동을 하도록 하겠다, 뭐 그런 거. 일명, 행복배달 빨간자전거 사업.”
“그래?”
우정의 반응은 맨송맨송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일이 많아지는 건데 아무런 감흥이 없느냐고?”
우체국의 새로운 사업내용이 영미는 신경 쓰였다. 취지는 좋지만 집배원의 일이 그렇게 여유롭지도 않았다. 집배에 주민 파수꾼 노릇까지 하자면 일이 더 분주해질 터였다.
“좋은 일이잖아. 누군가 해주면 나야 고맙지.”
“생각은 어디 외출하셨나? 해주긴 누가 해줘. 우리가 해야 된다고…… 행복배달 빨간자전거.”
영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같은 우정을 일깨웠다.
“나한텐 왠지 좋은 일 같은데……. 홀로 계시는 우리 어머니를 누군가가 들여다봐 준다는 거잖아. 나는 찬성.”
우정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식판을 들고 일어선 그는 윙크까지 날렸다.
어쩌면 우정이 생각했던 일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되어줄지 모를 일이다. 그 자신이 원하던 기회가 발 빠르게 찾아왔다고
여겼다. 망설이거나 머뭇거릴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와 다시 시작할 것이다.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아버지 김효천의 곁으로. 해자의 곁으로 말이다. 하리의 꿈을 좇아 떠나온 고향이었다. 서울의 집배원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나마 설레고 또 고통스러웠다. 그것뿐이다. 선몽도 악몽도 아닌 삶, 그것뿐이다.
우정은 전근을 신청했다. 처음부터 하리가 원했던 일이다. 혼자 도시로 나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 우정이 억지를 부렸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하리가 돌아오고 싶을 때, 그곳에 있으면 된다. 휴식이 필요하다면 그때에 곁에 있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인수인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향 우체국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