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청의 패전으로 드디어 조선이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며 환호하고 있을 때, 본국에 가 있던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근무지인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자 누구보다 기분이 언짢은 사람은 개화파의 수장 김옥균이었다. 다케조에가 또다시 묄렌도르프의 꾐에 빠져 개화파의 일을 방해한다면 개화파의 거사는 와해될 것이다. 대리공사 시마무라는 시대 상황이 바뀌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면 친청사대파를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무망한 일이었다. 1884년 10월 다케조에가 인천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외무독판 김홍집과 협판 김윤식이 야인으로 물러나 있는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다케조에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김옥균은 거절했다. 그날 마침 신축 운동장에서 축구놀이를 하기로 한데다 미국공사 푸트, 영국영사 애스턴 부부와 만찬을 하기로 되어 있어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만찬에는 민영익 등 민씨 일파도 초청되었다. 그날 김홍집과 김윤식이 다케조에를 찾아가자 기분파인 다케조에는 청불전쟁과 천하대세를 논하고 나서 외무독판 김홍집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
“내 들으니 귀국 외아문에는 아직도 청국의 노예 노릇을 하는 자가 몇 있다고 하던데, 내가 그들과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오.”
이어 그는 외무협판 김윤식도 빼놓지 않고 씹었다.
“당신은 본디 한학에 능하고 청국과 가깝게 지내면서 어찌하여 청국에 들어가서 벼슬하지 않소?”
다케조에는 그처럼 외교관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무릇 한 나라의 정책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다케조에가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안 돼 김옥균은 한성순보의 발간 업무를 맡아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인 청년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불러 물었다. 장기간 본국에 가 있다 임지로 돌아온 다케조에가 과연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 점이 궁금했던 것이다.
“다케조에 공사가 새로 부임한 뒤에 귀담아들을 말이 있던가?”
“어제 가 보았는데 별로 한 이야기는 없었으나, 기색이 매우 활발하여 실로 예전의 다케조에가 아니었습니다.”
이노우에는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자신을 서울로 데려온 사람이 김옥균이나 다름없기에 그는 언제나 김옥균을 스승처럼 깍듯이 대했다. 이노우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수제자로 게이오(慶應)의숙을 졸업하자 후쿠자와의 지시로 조선으로 건너와 한성순보의 발간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일본 부국강병론의 신봉자로서 큰 뜻을 품고 있어 조선의 정세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박영효가 한성판윤이 되자 한성순보의 발행을 추진했던 것도 백성의 개명과 국론 통합을 위해 신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후쿠자와의 권고를 따른 것이었다.
“앞으로도 공사의 동정을 잘 살피고 들은 대로 알려 주기 바라네.”
김옥균은 9살 연하인 이노우에에게 살갑게 대했다. 글 잘하고 말 잘하는 김옥균의 또 하나의 장기는 사람 사귐이었다. 그는 나이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폭넓게 사귀었다. 외국인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14세나 아래인 윤치호와도 스스럼없이 나랏일을 논했고, 윤치호가 일본에 머무르고 있을 때는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일본인인 이노우에에게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동정을 알려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허물없이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케조에의 의중이 몹시도 궁금했던지라, 김옥균은 마침내 그 날 오후 일본공사관으로 찾아갔다. 다케조에는 조선으로 건너오는 도중 배 안에서 감기에 걸렸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다케조에의 침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자 김옥균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로했다.
“귀공도 알다시피,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 조선을 구하려면 먼저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오. 그러려면 귀국처럼 유신을 단행하여 정부를 혁신하고 병력을 증강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자금이오. 때문에 이 사람이 국왕 전하께서 친히 작성해 주신 국채위임장을 받아 가지고 귀국까지 건너갔던 것인데, 귀국 정부에서 냉대하는 바람에 일이 와해되고 말았소. 부득이 미국 공사에게도 부탁해 보았지만, 그 일도 실패로 끝났소. 할 수 없어 제일은행에서 10만 원, 20만 원이라도 대여받으려 했으나, 그 일마저도 이노우에 외무경이 외면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소.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인 것이며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소.”
“누구의 잘못이라 하겠습니까. 일시 오해로 그리된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 주세요.”
다케조에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사과하듯 말했다. 그는 김옥균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 동감한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귀국의 개혁을 돕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헤어질 무렵 다케조에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3년 전부터 우리나라가 구습을 타파하고 독립을 이룩하려면 귀국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시종일관 그런 방향으로 노력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 정부의 무상한 변덕으로 우리 당은 회복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었소. 지금 공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르겠소.”
뼈가 있는 말이었으나 김옥균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릇 한 나라의 정책이란 때에 따라 변하고 대세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어느 하나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다케조에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다케조에와 헤어지자 김옥균은 곧바로 박영효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케조에와 나눴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일본 정부의 정책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박영효도 몹시 기뻐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두 사람은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거사 계획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박영효와 헤어지자 김옥균은 다시 홍영식을 찾아갔다. 마침 그 자리에는 서광범이 먼저 와 있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나눴던 대화를 되풀이하여 설명했다. 그러자 홍영식도 몹시 기뻐하며 화답했다.
“우리가 오늘날처럼 위중한 시대를 맞아 한목숨을 버림으로써 크게 개혁하려는 뜻을 품었더니, 하늘이 어여삐 여겨 우리를 돕는 것 같소이다. 시운이 마치 물줄기가 합쳐져 흐르는 것 같이 크게 열리는 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지난번 일본인들을 고용하려던 계획 또한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겠네요.”
일본인을 고용하려던 계획이란 개화파가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고, 일본인 용사 수십 명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람을 보냈던 것인데, 그 계획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처럼 개화파 핵심인사들은 거사에 필요한 무기와 화약을 구입하고 용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케조에가 개화파의 정변을 부추기다
이튿날 박영효가 일본공사관으로 찾아가 다케조에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다케조에가 파격적인 말을 했다.
“청국이 곧 망할 테니 개혁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그는 그처럼 개화파를 자극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 용사 수십 명을 고용하기로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미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있었다. 다만 정변을 일으키려면 일본의 협력과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데, 서울로 돌아온 다케조에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다케조에가 생각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개화파를 지지하자 개화파 인사들은 고무된 나머지 다케조에가 오히려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기까지 했다. 평소 유약한 인물로 알려진 다케조에가 그처럼 적극적인 표현을 한 것으로 볼 때, 일본 정부의 대조선 정책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같은 일본 정부의 정책 변화는 고종을 알현하는 다케조에의 자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해 11월 초 다케조에는 외무독판 김홍집을 통해 고종에게 독대를 청했다. 독대에 앞서 다케조에는 일본인이 만든 무라타(村田) 총과 외무경이 선물하는 총 등 16자루를 고종에게 예물로 선사했다. 이어 마련된 독대 자리에서 다케조에는 일본이 임오군란 때 입은 손해배상금으로 조선에서 받은 돈 중 40만 달러를 고종에게 바쳤다.
“이 돈은 저희 천황께서 특별히 귀국의 양병비(養兵費)로 정하여 독립 기금으로 드리는 것이오니 결코 다른 비용으로 사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어 그는 천하대세를 논하며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할 것이라 단정하고, 대원군이 중국에 유폐되어 있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은 내정을 개혁하여 구미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이므로 하루속히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소망이라고 덧붙었다. 그는 그처럼 고종에게 친청정책에서 벗어나 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3일은 일본 천황의 탄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이었다. 일본공사관은 교동에 새로 지은 공사관에서 축하연을 개최했다. 초청 대상자는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와 영사였고, 조선인으로는 홍영식을 비롯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 외에 외무독판 김홍집과 전영사 한규직이 포함되었다. 묄렌도르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술이 얼큰해지고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다케조에가 청국영사 진수당(陳樹堂)을 가리켜 ‘무골 해삼’이라 일컬음으로써 좌중을 어리둥절케 했다. 그 말을 조선어로 통역했으나 알아듣지 못한 진수당이 묄렌도르프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묄렌도르프도 알아듣지 못하고 영국영사 애스턴에게 물었으나, 애스턴 역시 모른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다케조에가 김옥균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사과했다.
“내가 지난해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듣고 당신을 믿을 수 없다 하여 몇 가지 험담을 이노우에 외무경, 마쓰카타(松方正義) 대장경 등 몇몇 사람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이 작년에 우리나라에 가서 숱한 곤란을 겪은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나라를 위해 애썼던 것이고, 나 또한 나라를 위해 했던 일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김옥균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를 거사 장소로 정하다
일본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개화파의 거사계획은 구체화되었다.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키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였는데, 그들을 제압하려면 일본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동안 개화파 주역들은 일본의 속셈을 알 수 없어 주저하고 있었는데, 평소 소심하던 다케조에가 개화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자 드디어 개화파는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거사의 큰 원칙은 사대파 요인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내정을 개혁함으로써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이 내건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비상수단을 발휘하여 민영익 이하 사대파 괴수들을 제거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을 끊고 독립 국가를 세운다.
둘째, 궁중의 요망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민비로 하여금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셋째, 고종에게 건의하여 튼튼한 책임 내각을 구성한다.
그처럼 거창한 정변을 모의한 주모자는 홍영식을 비롯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사대파 요인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 계책을 마련해 놓고 신중히 검토했다. 첫째는 미구에 개최하게 될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사대파 괴수들을 초청하여 한꺼번에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어두운 밤에 청국인으로 변장한 자객을 시켜 민영목, 한규직, 이조연 등을 암살한 뒤 그 죄를 민태호 부자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경기감사 심상훈을 매수하여 백록동 정자에서 잔치를 벌이게 한 뒤 그 자리에 모인 친청사대파를 처치한다는 것이었다. 백록동 정자는 홍영식의 별장으로 외지고 조용한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행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중에서 제2안은 민씨 일파의 내부 반목과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실행 가능성이 낮아 폐기했고, 제3안은 경기감사 심상훈이 교체된다는 소문이 있어 폐기했다. 그러다 보니 제1안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에서 거사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거사 장소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로 한다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어느 날 개화파 핵심 인사들이 모여 거사 모의를 할 때, 김옥균이 홍영식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홍 공, 우정총국 낙성식 날을 언제로 잡았지요?”
행사의 공식 명칭은 ‘우정총국 개국식’이라 해야 함에도 당시에는 ‘우정총국 낙성식’이라 했다. 우체국 창구 시설을 갖추기 위해 청사의 일부 시설을 개축했기 때문이다.
“우정총국 낙성식 행사는 불원간에 개최해야 하는데, 아직 날짜는 정하지 않았어요. 왜 그러시죠?”
홍영식이 뜨악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언제로 잡을 거지요?”
김옥균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우편을 개설한 날이 이달 초하루이니 아무리 늦어도 이달 중으로는 개최해야죠.”
‘이달’이란 음력 10월을 가리켰다. 우정총국을 개국하고 우편사업을 개시한 날이 음력으로 10월 1일이었으니 개국식 행사는 10월 중에 개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낙성식 행사는 10월 중에 개최하기로 하되, 정확한 날짜는 근일 중에 결정하기로 합시다. 지난번에도 얼핏 이야기했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거사 일은 그날로 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김옥균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왜 하필 우리의 거사 일을 우정총국 낙성식 날로 잡습니까?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될 것 같아요.”
홍영식은 고개를 외로 틀며 이의를 제기했다. 개화의 첫 번째 작품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를 피로 물들일 수야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문제가 되긴 뭐가 문제가 됩니까? 우정총국 낙성식 날 거사를 단행한다면 우정총국으로서는 오히려 영광이라 생각해야죠. 우리의 거사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것인데, 거사에 성공하게 되면 오히려 뜻깊은 날이 되지 않겠어요? 4영사 등 사대파 괴수들을 자연스럽게 불러 모으려면 그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어요?”
연변이 좋은 김옥균이 그렇게 강변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날이 좋겠어요.”
서광범이 맞장구쳤다.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듯 홍영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개화의 첫 번째 작품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피로 물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때 개화파의 행동대장격인 박영효는 개화파 주역들이 각기 맡아야 할 역할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부여하고자 했는데, 홍영식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홍영식: 모의 총람의 제일인자
박영효: 집행의 총지휘
서광범: 참모 계획
김옥균: 일본공사관과의 교섭 및 통역
서재필: 대문을 막고 병사를 영솔
이규완·윤경순: 사관학교 생도 10여명을 인솔하고 방화와 주륙 등 하수 임무 일체를 맡음
그처럼 정변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총책임자 자리는 김옥균도 박영효 자신도 아닌 홍영식에게 맡기고자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정변의 현장을 지휘하는 책임은 박영효 자신이 맡기로 했다. 같은 개화파 인사 중에서도 박영효가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홍영식이었다. 실제로 홍영식은 문벌이 좋고 학식이 풍부한 데다 온후하고도 싹싹한 성품이어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실무에 밝아 일을 두루 챙길 줄 알았다.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두루 능하고 재주가 있으나 덕과 지모가 부족한 김옥균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따라서 김옥균이 정변을 구상한 이론가였다면 홍영식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재목이었던 셈이다.
실제 거사에 사용할 병력으로는 박영효가 광주유수 시절 양성한 군사 1천여 명을 이용하기로 했다. 박영효가 양성한 병사들은 그가 광주유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서울로 징발되어 전영사 한규직과 후영사 윤태준 등이 나누어 거느리게 되었으나, 그중 일부 병사는 교관 신복모가 거느리고 있어 실제로는 박영효의 수하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200명을 더하면 꽤 쓸 만한 병력이 되었다. 이에 비해 사대파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일반 병사 400명과 잡졸 800명이 있었으나, 제대로 훈련된 병력이 아니어서 두려워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500명 남아 있는 청나라 군사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친청사대파와의 무력 대결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