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매관매직은 이미 오래전부터 횡행하고 있었다. 돈으로 벼슬을 사고, 벼슬을 산 자는 그것을 이용하여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았다. 과거는 실시되고 있었으나 형식에 불과했다. 과거 역시 돈으로 샀다. 매관매직을 처단해야 할 임금이 그 일에 앞장섰다. 벼슬을 산 자가 어음을 가져오면 고종은 “이 어음이 배동익에게서 나왔는가?” 하고 물었다. 배동익은 당시 서울의 거상이었으니 믿을 만한 어음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처럼 왕의 체면도 잊은 채 벼슬 팔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불견이 전국적으로 횡행하고 있었다.세월이 흐르면서 종양이 곪을 대로 곪아 터지기만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임금이나 신하 어느 누구의 책임이라 할 수도 없었다. 임금은 임금대로 신하는 신하대로 썩을 대로 썩어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든 낮은 자리에 있든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따질 뿐 나라의 흥망이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상인의 감각이 마비된 상태, 그것이 바로 당시의 조선 사회였다.
밤마다 잔치를 베풀고 연회를 즐기다
민비는 그렇게 긁어모은 돈을 연회와 푸닥거리로 탕진했다. 영악하기로 소문난 여자였으나 민비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었다. 뒤늦게 낳은 아들 다시 말해, 뒷날의 순종이 몸이 부실하여 시름시름 앓았다. 미신에 빠져 있던 민비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중을 불러 염불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궁중은 어느덧 무당이나 판수, 중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산과 절에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막대한 재물을 뿌렸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하마터면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을 뻔했던 민비는 간신히 장호원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만난 무당에게 대궐로 돌아갈 날을 점치게 했는데 신기하게도 적중했다. 미신을 좋아했던 민비는 무당을 데리고 환궁했다. 궁중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 주었다.
무당이 삼국지 속의 명장 관우의 영을 받은 딸이니 마땅히 사당을 지어야 한다고 하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그녀를 진령군(眞靈君)에 봉했다.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게 했다. 왕자에게나 주는 군(君)의 칭호를 일개 무당에게 붙여 주었으니 정상인의 처사라 할 수 없었다. 사당이 자리 잡은 위치가 동소문 안쪽으로 서울의 북쪽이었기에 ‘북관왕묘(北關王廟)’ 또는 ‘북묘(北廟)’라 불렸다. 관우의 딸로 둔갑한 무당 진령군은 관우를 본뜬 웅장한 차림을 하고 위세를 뽐냈다. 그녀는 수시로 민비와 고종을 찾아가 감언이설로 신의 계시를 전하며 엉뚱한 사람을 벼슬자리에 추천했다. 그러자 벼슬을 노린 자들이 돈을 싸들고 북묘를 찾아다니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민비와 고종은 그녀가 추천한 자들을 모두 높은 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끌어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말로 금강산 1만 2천봉 봉우리마다 무당을 보내 쌀과 돈을 쌓아 놓고 빌게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국고는 고갈되고 나라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그처럼 나라 꼴이 우습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고종과 민비는 놀이를 좋아하여 밤마다 잔치를 베풀고 연회를 즐겼다. 배우나 판소리꾼, 기생들이 연극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대궐 뜰에는 밤새도록 등불이 켜져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고종과 민비가 올빼미족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조정 관원들은 임금이 잠들어 있는 오전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정사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유흥과 놀이는 필연적으로 국고 고갈을 가져 왔다. 왕궁에서 밤마다 잔치를 벌이고 놀이를 즐기는 동안 국고는 소리없이 축났다. 흥선대원군이 10년 집권하면서 어렵게 쌓아놓은 돈이 1년이 채 안 돼 바닥났다. 그 후유증은 임오군란이라는 군사변란으로 나타났다. 임오군란은 나라를 지켜야 할 군사들이 상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항하여 일으킨 변란이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급료를 받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식 군대를 양성하자, 차별 대우를 받게 된 구식 군대가 밀린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데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1882년 여름 전라도에서 보낸 세곡선이 쌀을 싣고 올라왔다. 선혜청은 무위영 소속의 병사들에게 밀린 급료 중 1개월분의 쌀을 우선 지급하기로 했다. 지급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는 데다 그 양도 절반밖에 되지 않자 병사들이 분노했다. 선혜청 관리들이 그들의 항의를 강압적으로 진압하려 하자 화가 치민 병사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흥분한 병사들은 양곡을 나누어 준 고지기를 타살한 뒤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난입하여 가재도구를 때려 부쉈다. 이어 민가 도적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야 한다며 창덕궁으로 난입했다. 민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대궐 뒷문으로 빠져나가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그 과정에 흥선대원군이 개입하여 잠시 정권을 잡기도 했다. 그처럼 군대가 변란을 일으켰으나 정부는 그것을 평정할 힘이 없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인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정사를 맡기고 몸을 사렸다. 민비의 행방이 묘연하자 흥선대원군은 민비의 죽음을 공표하고 장례 절차를 밟았다.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는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그녀는 민태호 등 민씨 일파를 사주해 흥선대원군이 난을 꾸몄다고 청나라에 거짓으로 알리고 구원병의 파견을 요청했다. 청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장수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 오장경(吳長慶) 등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조선으로 보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군사 1,500명을 조선에 보냈다. 인천에 상륙한 청군 장수들이 대원군을 납치하여 천진(天津)으로 끌고 가자 대원군의 통치는 맥없이 끝나고 다시 민씨 일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군란이 수습되자 고종은 그동안의 실정을 반성하고 개혁을 다짐하는 글을 전국에 반포했다. 그리고 기무처를 신설하는 등 기구의 개편을 서둘렀다. 개화파의 의견을 들으며 개화정치를 펼치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친정사대파와 개화파 간의 마찰이 불가피하여 양자 간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임오군란은 그 변란을 수습하는 과정에 청과 일본 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임으로써 조선이 외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한 청나라는 군란이 끝난 뒤에도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며 이른바 종주권을 강화했기 때문에 조선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래저래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가난에 찌든 백성은 굶어 죽기 일쑤였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일부 백성은 도적질을 했다. 그럼에도 벼슬아치들은 파쟁을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근일에 외지에는 명화적(明火賊)들이 들끓고 성내에는 불한당들이 설치고 있다. 벼슬아치는 탐욕만 일삼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전폐(錢幣)가 고르지 못하여 물가는 뛰어오르고 있는데, 정부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는 취하지 않고 한갓 뇌물만 탐낸다. 인민들은 입에 풀칠할 곡식이 없는데도 부역에 시달리고 있으며, 조정에 소인이 가득하여 사욕만 추구하고 있다. 척신과 환관들이 권세를 부려 관직을 파는 길이 열려 있고 상하가 이익만 취하여 관민이 모두 피폐해졌다. 우리 인민들의 도탄이 지금처럼 성한 때가 없었다.”
김옥균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다
게다가 당오전의 발행이 실패로 끝나면서 나라 경제가 더욱 피폐해졌다. 민생은 날로 고달파지고 국세가 날로 쪼그라들어 나라 살림을 지탱해 나가기 어려웠다. 그러자 집권층인 민씨 일당이 모여 그 폐해를 구제할 방안을 논의한 끝에 묄렌도르프에게 그 방책을 묻기로 했다. 그때 묄렌도르프가 내놓은 처방이 걸작이었다.
“지금 조선의 폐해를 제거하려면, 그것은 당오전에 있지 않고 무엇보다 먼저 김옥균을 제거해야 합니다. 온갖 말로 군왕을 속이고 여러분을 해치려 한 자는 김옥균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까닭으로 폐해의 근본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그 말단을 다스리려 합니까? 더구나 여러분은 동문동종(同門同種)으로서 때때로 서로 정의가 틀어지니 이것은 나라의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힘을 합쳐 먼저 나라의 가장 폐해가 되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좋은 계책 아니겠습니까?”
김옥균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는 듯, 묄렌도르프는 서슴지 않고 김옥균을 씹으며 민씨 일파의 단결을 강조했다. 그때부터 친청사대파는 민영익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김옥균과 개화파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김옥균을 비방하는 한편, 고종 앞에서 김옥균은 조선의 암이라며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자 개화파와 사대파는 개와 원숭이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원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에 대한 고종의 신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종이 어느 날 김옥균을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제민이 경을 해치려 하니 부디 호신에 유념하라.”
‘제민(諸閔)’이란 민씨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종의 말을 듣고 나자, 김옥균은 관원 자리에서 물러나 때를 엿보기로 했다. 그는 고종을 찾아가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금 국내 정세를 살펴보건대, 정령(政令)이 한 가지도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고 분당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신은 잠시 시골로 내려가 화를 면하고 후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듣자 고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김옥균은 그 길로 벼슬을 내놓고 동대문 밖에 있는 별장에서 지냈다. 춘추관으로 전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김옥균은 그처럼 친청사대파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나 최고 통치자인 고종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벼슬을 버리고 동대문 밖 별장에 은거하는 동안에도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아 여러 차례 창덕궁을 드나들어야만 했다. 일본과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종은 그를 불러 자문을 구하곤 했다. 그 무렵 주한일본공사관에서 김옥균과 개화파에 대한 자세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본국에 가 있고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가 공사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시마무라는 김옥균에게 자주 접근하며 개화파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하곤 했다. 다케조에의 배신으로 대사를 그르친 바 있어 김옥균으로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시마무라가 자못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기에 그의 접근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민영익은 원세개 등 청군 장수들과 가깝게 지내며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가 일본인을 미워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보빙사 전권대신으로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을 경유했을 때 그는 미국인 조던(Jordan)을 통역으로 쓰기로 했는데, 조선 정부가 미국과 가까워짐을 경계한 일본 정부가 방해한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었다. 그때 배신감을 느낀 민영익은 일본인을 멀리하는 한편, 청군 장수 원세개(袁世凱)와 의형제를 맺고 만날 붙어 다녔다. 그는 날마다 청군 장수들을 초청해 회식하며 위세를 부리곤 했다. 또한 우영사 윤태준과도 의형제를 맺으며 아부를 일삼는 무리들과 작당하여 개화파를 괴롭혔다.
일본 대리공사가 개화파에 협조할 뜻을 내비치다
민영익과 일본인들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자, 하루는 김옥균이 친청사대파와 일본인들을 초청하여 일본식 연회를 베풀었다. 민영익, 민영목, 김윤식, 윤태준, 이조연, 조영하 등 친청사대파로 지목되는 인사들을 모조리 초청하고 대리공사 시마무라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중대장을 비롯한 일본인 10여 명도 같이 초청했다. 친청사대파의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울 수 없는 연회였으나, 은퇴한 사람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지 모두 참석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친청사대파와 일본인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당시로써는 가장 민감한 국제문제였던 청불전쟁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의견 충돌이 생겼던 것이다.
“동양 3국 중 청국은 대국이요 조선과 일본은 소국이니 청국이 승전해야 하오. 그래야만 조선과 일본도 서양인들에게 압제를 당하지 않을 것이오.”
민영익이 점잖게 입을 열어 청나라를 편들었다. 그러자 일본 낭인 오카모토(岡本)가 눈알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었다.
“일본이 소국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지도로 보더라도 일본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오.”
“일본은 중국에 비하면 아직 병력이 부족하고 재정이 부족하고 인민 수가 적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오. 민 대감이나 내가 소국이라 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김윤식이 그처럼 변명했다.
“뭐라고요? 지금 병력이 부족하다, 뭐가 부족하다 하는데 우리 일본 군대는 훈련이 잘돼 있고 규율이 있소. 일기당천하는 용맹이 있소.”
오카모토는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란 말이 있지 않소. 아무리 일본 군대가 강병이라 해도 상대편이 다수라면 당할 수가 없는 법이오.”
민영익이 다시 점잖게 응수했다.
“재작년 군변(軍變) 때도 일본 군대는 와 있지 않았지만 30여 명의 공사관원이 국기와 공사를 호위하고 정정당당하게 인천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소. 청국인들은 도저히 이렇게 못 합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 국왕은 일본에 사죄하고 배상금 40만 원을 지불했으며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던 것 아니오. 임오군란은 무지한 폭도들을 선동하여 야기 시킨 것으로 결코 백성 전체의 뜻이 아니었소. 그 사건을 기화로 청국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감금하고, 목인덕이라는 이상한 자를 내보내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고 있는데, 대감들은 지금 그것을 감수하고 있는 것 아니오.”
“우리는 지금 청국의 은혜로 평화를 누리고 있소. 우리가 오늘날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청국의 보호가 있기 때문이오.”
이번에는 민영목이 강변했다.
“무엇이 평화란 말이오? 차라리 왕후 민당(閔黨)의 승리라 하시오. 민씨 일당의 전횡이라 왜 말 못 하시오?”
오카모토가 사정없이 들이댔다.
“우리는 청국의 보호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나 일본은 조금도 고마울 것이 없소.”
민영익이 차가운 표정으로 내뱉었다.
“정말 없소?”
오카모토가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도 없소.”
민영익은 여전히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자 오카모토를 비롯한 일본인 낭인들이 주먹으로 밥상을 치고 일어서며 민영익에게 대들려 했다. 자칫 친청사대파 인사들을 붙잡고 육박전이라도 벌일 태세였다. 그러자 김옥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일본인 낭인들을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점잖은 자리에서 이러지들 마시오. 서로 친목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래서야 되겠소?”
김옥균은 일본인들을 진정시키고 나서 민영익 등 친청사대파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리고 일본인들과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그날 이후 김옥균과 일본공사관과의 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동안 쌓였던 오해가 풀렸던 것이다. 어느 날 김옥균이 일본공사관을 찾아가 대리공사 시마무라를 만났다.
“지금 우리 조선은 혼자의 힘으로는 잠시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소. 그래서 나라를 살리자는 충정에서 귀국으로부터 차관을 얻고자 국채위임장까지 준비해 가지고 갔던 것인데, 귀국 정부가 어린애 장난처럼 정략을 바뀌니 도대체 우리 조선은 어느 나라를 믿어야 한단 말이오?”
김옥균은 마음속에 쌓여 있는 앙금을 그렇게 털어놓았다.
“각하의 지난해 일은 다케조에 공사와 통정을 다 하지 않은 때문이며, 우리 정부에서 각하를 소홀히 대접한 것도 다케조에 공사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케조에 공사가 의아스럽게 생각한 것도 당시의 사세가 그러했기 때문이며, 우리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정책에 어찌 조금이라도 변함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동양의 대세는 청·불 관계가 몹시 급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나라를 위하여 개혁을 추진한다면 우리 정부로서도 불가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시마무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개화파에 협조할 뜻을 내비쳤다. 그것이 시마무라 개인의 생각인지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고 하는 말인지 판별할 수 없었으나, 아무튼 희망을 주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그 뒤에 나눈 시마무라와의 대화에서도 김옥균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다시 서울에 와서 집무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매우 불길한 소식이었다. 지금 친청사대파는 청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개화파를 말살하려 하는데, 그 속셈을 짐작할 수 없는 다케조에가 서울로 돌아와 또다시 묄렌도르프와 부화뇌동한다면 그 폐해가 어느 정도에 이를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김옥균은 시마무라에게 달려가 불안감을 표출했다.
“다케조에 공사가 다시 서울에 온다는데, 그가 또다시 목 참판과 부합하여 우리 일을 훼방한다면 그 폐해는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소.”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다케조에 공사가 지난날 여러분을 의심하고 꺼린 것은 사사로운 일이요, 오늘날 공들이 꾀하는 바는 국사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일 때문에 국사를 소홀히 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결코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시마무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김옥균은 일본의 대조선 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