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1882년 6월 임오군란의 발발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 김옥균은 첫 번째 일본 시찰을 마치고 귀국했다. 서울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폭도 진압을 명분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상륙하고 흥선대원군은 청군에 붙잡혀 중국으로 끌려갔으며, 지방으로 피난했던 민비는 궁궐로 돌아왔다.
흥선대원군 납치에 대한 두 파의 시각은 판이하게 달랐다. 개화파는 흥선대원군이 개화정책에는 반대했으나 내정 개혁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그의 납치를 주권 침해로 몰아붙였다. 반면에 친청사대파는 군란을 사주한 자는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고소해 했다.
임오군란을 전후해 국내외 정세가 어지러울 때 고종이 취한 정책은 개화와 보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 같은 변덕스러운 정책의 흔들림은 정부 조직의 잦은 개편으로 나타났다. 1880년 12월 조선 정부는 개화정치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해 기존의 6조(六曹)와는 별개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는 서양 제국의 외교ㆍ통상 업무에 대비한 대외정책과 함께 재정 및 군사 업무를 담당할 기구로 설치한 것이어서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셈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의정부와 6조는 사실상 왕의 자문기관 내지 보조기관으로 퇴화했다.
이듬해 2월 다시 기구를 개편하여 통리기무아문 안에 총리통리기무아문과 경리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다시 그들 기구를 폐지하고 기무처를 발족시켰다. 개화파 중심으로 구성된 기무처는 몇 달에 걸쳐 협의한 끝에 1882년 11월 종래의 통리기무아문을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하는 통리아문과 내정을 관장하는 통리내무아문으로 이원화했다. 그 해 12월에는 다시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했다.
그들 아문의 최고 책임자로는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독판을 두고 다음 책임자로 차관급인 협판을, 그 밑에 참의와 주사를 두었다. 당시 독판에는 영의정 홍순목을 비롯하여 민태호, 김병국, 민영위 등 원로급을 앉혔으나 협판에는 김홍집, 김윤식, 민영익, 어윤중, 홍영식 등 개화파 중심의 중견 내지 신진 관원을 앉혔다. 그처럼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서 소속 기구도 바뀌었는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는 정각사, 장교사, 부교사, 우정사 등 4사를 설치하고, 통리군국사무아문에는 이용사, 군무사, 감공사, 전선사, 농상사(農桑司), 장내사, 농상사(農商司) 등 7사를 설치했다. 그리하여 1882년 12월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근대적인 행정기관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한 기구로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우정사를 설치하고 홍영식을 협판에 앉히다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1개월여 만에 진압되자 보수와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대한 반작용으로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동년 7월부터 고종은 몇 차례에 걸쳐 혁신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특히 7월 20일 백성에게 내린 전교를 통해 나라 정치를 새롭게 시작하려 하니 좋은 의견이 있으면 누구든지 진언하라고 널리 알렸다. 그 결과 12월 말까지 100여 건의 상소문이 올라왔는데, 그 중에는 매우 진취적이고도 혁신적인 의견이 들어 있었다.
백성들의 건의를 종합해 보면, 개화를 촉진하는 서적을 간행할 것, 외국어를 가르칠 것, 외국인 기사를 채용하여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도록 할 것, 새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서울에 훈련원을 설치할 것, 상회소(商會所)와 국립은행을 설치할 것, 화륜선을 건조하고 군항을 설치할 것 등으로 다양했다. 요컨대, 조선 사회를 사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유교 도덕은 그대로 지키되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비슷한 것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 할 수 있었다. 지식인 사이에 그 같은 사상적인 변화가 있었기에 개화의 움직임이 표면화될 수 있었고,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하여 우정사를 설치했던 것이다.
우정사는 서양식으로 새롭게 발달하고 있는 교통·통신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은 ‘우정사는 도로 수송의 일, 즉, 전보, 역전(驛傳), 철도 및 수륙(水陸)의 통로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관영이나 민영을 막론하고 장정(章程)을 심의 제정하여 법으로 보호하고, 점차 이를 확산하도록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처럼 우정사 업무에 역전 업무가 들어 있어 그 기구가 전보와 함께 우편 업무도 취급하기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우정사의 설치 일자는 1882년 12월 5일로 양력 1883년 1월 13일이었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문물을 시찰하고 난 뒤에도 홍영식의 자리는 계속 바뀌었다. 통리기무아문 부경리사, 홍문관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 참의군국사무, 이조참의 등으로 새로운 자리가 계속 이어졌다. 직함만 들어서는 도대체 뭘 하는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1882년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한 기구로 우정사가 설치되고 협판으로 임명되면서 그 기구의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할 때 일본 우편제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였기에 그가 자진하여 우정사 협판 자리를 맡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무렵 홍영식은 두 가지 중요한 일에 관여했다. 하나는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이고, 또 하나는 일본과의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의 체결이었다.
1882년 4월 조선 정부는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와 두 나라 간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개시했다. 우리 정부의 대표는 신헌, 부대표는 김홍집이었다. 협상 장소는 인천이었다. 그때 홍영식은 협상 대표에게 최종 결정권자인 고종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같은 업무를 맡고 있던 민영익이 상중이어서 출사할 수 없었기에 홍영식이 제반 업무를 주관했다. 그처럼 미국과의 협상은 신헌과 김홍집이 맡고 있었으나 왕명을 받들어 주요 사항을 결정하는 임무는 홍영식이 맡고 있었으니, 미국과 수교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1883년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을 체결할 때 독판 민영목과 함께 협상을 진행했다. 부산구설해저전선이란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長崎) 간을 연결하는 해저전신선로를 가리켰다. 조약의 핵심은 ‘양국 정부는 덴마크 회사인 대북부전신회사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가 일본 규슈(九州)의 서북해안으로부터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해저전선을 가설함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 전신사업권을 침해할 수 있는 독소 조항이 들어 있어 교섭이 지지부진했는데, 일본측이 요구한 30년의 독점권을 25년으로 단축하는 선에서 타결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은 애초에는 독판 조영하와 협판 김홍집이 담당하여 추진했으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자 조영하가 해임되고 민영목이 그 자리를 맡으면서 같은 날 참의에서 협판으로 승진한 홍영식과 함께 교섭을 진행하여 타결했던 것이다.
우정사가 설치된 이후 그 기구가 담당한 우편이나 전보, 또는 도로 업무가 어느 정도 추진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883년 3월과 4월 한성과 인천 사이의 도로를 차마가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연도의 지방관에게 명하여 크게 수리한 일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도로를 넓히는 일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키기까지 세 차례 일본을 방문하다
1884년 4월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김옥균은 맥없이 귀국했다. 일본에서 차관을 얻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며 큰소리쳤기에 그 참담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천하의 기재라 자부하던 김옥균으로서는 차마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동안 애써 추진한 울릉도 개척사업은 물론, 고래잡이 사업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사관생도 등 젊은 인재의 양성계획도 당분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난처한 것은 고종을 볼 낯이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국채위임장만 있으면 300만 원의 차관을 얻기로 굳게 약속되어 있다며 설득했으니 자칫 임금 기만죄로 몰린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걱정거리는 또 있었다. 개화파의 앞날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개화파의 중심인물은 박영효와 서광범, 그리고 김옥균 자신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는 글 잘하고 말 잘하는 데다 머리 회전이 빠른 김옥균이었다. 그들은 1881년과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면서 개화파 활동을 본격화하기로 결의했고, 이후에도 언제나 뜻을 같이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핵심 인물인 홍영식은 개화파와 뜻을 같이하긴 했으나 정치가라기보다 차라리 행정가였다. 정부의 요직을 맡아 나랏일에 전념하다 보니 한 눈 팔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개화파라기보다 친개화파로서 개화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국정에 몰두하고 있어 개화파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그들 편으로 끌어들어야 할 포섭의 대상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양군이 홍영식을 동지로 끌어들인 이유가 있었다. 독립당의 결심은 처음부터 매우 강경함이 있었다. 그들은 독립을 선언하려 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유력한 인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홍영식과 친교를 맺고, 마침내 그를 동지의 한 사람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해인 1883년 통리아문 소속기관인 박문국 주임으로 특채되어 그 기관에서 발행하는 한성순보의 실무진으로 활동했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뒷날 그렇게 회고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기까지 김옥균은 세 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다. 그가 맨 처음 일본을 방문한 것은 그의 나이 31세 때인 1881년 12월이었다. 그는 일본을 유람하고 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근대화 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의 발전 현장을 둘러보는 한편, 일본의 이름 있는 정객과 지식인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일본을 두루 살피는 동안 그가 느낀 감정은 놀라움과 부러움, 울분 등 복합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반면, 왜 조선은 그렇게 될 수 없느냐는 생각에 울분에 잠기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제대로 개화하려면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가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간 것은 1882년 8월이었다. 이번에는 수신사 박영효 등과 함께 갔다. 임오군란 직후 조선은 일본의 강요에 못이겨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의 사후 처리를 위해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고종은 그 자리에 일본을 잘 아는 김옥균을 보내려 했으나, 김옥균이 사양하며 금릉위 박영효를 추천하자 박영효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김옥균을 고문으로 동행케 했다. 그때 김만식이 부사로, 서광범이 종사관으로 동행했고 민영익이 별도의 명을 받고 그들과 합류했다. 뒷날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된 그들은 그렇게 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일본과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약정을 이행하기 위해 십 수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떠난 사신에게 조선 정부는 여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수신사 일행은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부탁하여 일본 은행에서 20만 달러를 융자받았다. 그 돈으로 여비 등 제반 비용에 충당했다. 당시의 조선은 그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조선 정부를 대표한 사절단으로 방일했기에 박영효, 김옥균 등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 일본 정객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구미 여러 나라의 공사들과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청의 세력 하에 있는 조선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대우하며 수신사 일행을 자못 융숭하게 대접했다.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멋대로 행동하는 중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세였다.
일본에서 개화파의 진로가 형성되다
그 중에서도 일행에게 가장 큰 감동을 안겨 준 사람은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였다. 후쿠자와는 박영효, 김옥균 등 수신사 일행을 따뜻하게 맞으며 개화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하고 있는 조선과 일본은 순치(脣齒)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조선과 일본 중 어느 한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게 되면 다른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 동안은 조선 이웃에 중국이 있어 종주국 노릇을 해 왔는데, 최근 중국은 서양 열강에 의해 분열될 것이라 합니다. 지금 같은 형세라면 결국 중국은 사분오열되어 서양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일본은 일찍이 구미 열강과 교류하며 선진 제도와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덕분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나, 조선은 아직까지도 구미 열강과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있어 걱정이 적지 않다 하겠습니다.”
후쿠자와는 그렇게 서론을 꺼내며 개화파 일동의 반응을 살폈다.
“종주국이라니요? 우리 조선은 독립국이지 중국의 속국이 아닙니다.”
김옥균이 부러 발끈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말을 실수한 것 같습니다.”
후쿠자와는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니 속국이 되어서는 안 되죠. 그러나 조선인 중에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도 사실 아닙니까?”
“더러는 있지요. 그러나 우리 개화당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조선은 반드시 독립국이 될 것입니다.”
김옥균은 힘주어 말했다.
“물론 그래야지요. 어느 나라든 자주권을 가져야 나라가 발전합니다. 조선에는 귀공들과 같은 개화당 인사가 있어 앞으로 나라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후쿠자와는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조선이 개화하려면 어떤 일부터 해야 할까요?”
나이로 보아 아버지뻘이기에 박영효는 후쿠자와에게 공손한 자세로 물었다.
“조선이 개화하려면 해야 할 일이 많겠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일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이 깨쳐야 합니다. 백성이 깨치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학교를 세워야 합니다. 백성의 머리를 깨치게 하는 것이 바로 학교 교육이죠. 우리 동양인의 수준을 서양인만큼 높이려면 서양인이 배우고 있는 것은 뭐든지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양과 같은 문명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또 하나는 신문을 발간해야 합니다. 나라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백성들이 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사정을 알아야 하고 온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사정을 알려 주고 온 백성이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신문입니다. 신문은 백성을 개명시키고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후쿠자와는 그처럼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개화 방안을 제시했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메이지유신 시대 일본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계몽사상가이자 일본 국민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한 뒤 1866년 ‘서양사정(西洋事情)’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초판이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일본 사회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그는 저술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시사신보(時事新報)’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이상적인 일본은 서양 문명을 흡수하여 국민의 사고방식을 개조함으로써 서양의 영국에 비견한 동양의 새로운 문명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는 일본은 한 마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나라였다.
“조선에서 신문을 발간하려면 일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귀공께서 추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또다시 박영효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조선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후쿠자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무튼 후쿠자와와의 만남은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다. 우선 유학생들을 쉽게 보낼 수 있었다. 아니, 첫 번째 유학생은 그들이 방문하기 전해인 1881년에 이미 입학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관원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각 기관과 산업 현장 등을 시찰했는데, 조사 어윤중을 수행한 유길준과 그의 매형 유정수는 게이오의숙에, 윤치호는 일본의 개화사상가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설립한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조사 어윤중이 후쿠자와를 찾아가 특별히 부탁한 덕분이었다. 후쿠자와는 유길준과 유정수를 자기 집에 유숙시키며 공부하게 했는데, 조선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열의가 그만큼 뜨거웠던 것이다. 덕분에 그들 3인은 조선인 최초의 해외 유학생이 될 수 있었다.
김옥균이 세 번째로 일본에 건너간 것은 1883년 6월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차관을 얻기 위해 고종이 써준 국채위임장을 들고 갔다. 그때 그는 일본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서재필, 서재창 형제와 이규완 등 60여 명의 학도들을 이끌고 갔다. 그 중에서 서재필 등 9명은 일본 육군소년학교인 도야마(戶山)학교에 입학시켜 신식 군사교육을 받게 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전문지식을 쌓도록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입학을 주선하고 뒷바라지를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한성순보의 발간도 도왔다. 사절단 대표 박영효가 신문 제작을 맡을 만한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게이오의숙에서 배출한 제자 중 3명을 골라 조선에 보냈다. 그 중에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끝까지 남아 한성순보 창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나머지 두 명은 조선에 온 지 4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경우 보수 세력이 강한데다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 개화의 전파가 쉽지 않다는 것이 그들이 서둘러 귀국한 이유였다. 아무튼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할 수 있었으나, 그 신문은 순 한문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