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섬 손죽도의 우체국 사랑
푸른 비단 같은 한려수도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 펼쳐져 있는 남해. 그곳에 크고 작은 섬들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곳에는 대부분 현대의 문명 이기로부터 소외된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
여수에서 배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손죽도 역시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인데, 그런 낙도에 우체국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그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탔다.
외로운 섬 손죽도
손죽도는 임진왜란 때 명장 이대원 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큰 인물을 잃어 손해가 크다며 損大島라 명명한 것이 뒤에 손죽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이대원 장군의 묘소와 사당이 모셔져 있는데, 주민들은 이 곳을 성역으로 여기고 있다.
여수에서 뱃길로 84.4km 떨어져 있는 작은 섬 손죽도는 행정상으로는 전남 여천군 삼산면 손죽리이며, 손죽도를 둘러싸고 있는 19개의 섬 중 4개만이 유인도이다. 유인도라고 해야 손죽도에 80여가구가 살 뿐, 나머지 3개 섬에는 모두 20여가구가 있을 뿐이다. 손죽도는 한 때 320여가구가 살 정도로 인근지역에서 가장 번창한 섬이었으나, 해방 후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하나둘 섬을 빠져나가 지금은 고작 120여 명의 주민만이 남아있다.
이들이 섬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교육문제를 들 수 있다. 이 섬에는 초등학교가 한 개 있는데, 그곳을 졸업하면 중 학교가 있는 육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교통수단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교통이 원활해진다 해도 거리가 너무 멀어 통학은 불가능하다.
과거 마을이 번창했을 당시에는 손죽초등학교의 학생이 3백명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전체 학생이 6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이 섬의 인구 변화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교통문제 역시 큰 애로사항이다. 손죽도로 가는 배는 여수에서 하루 2편이 있는데, 이 배는 손죽도와 초도를 거쳐 거문도에 입항한 다음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여수항으로 돌아오게 되므로 정작 손죽도에서 여수로 가는 배는 하루 1편에 불과하다. 그것도 날씨가 양호할 때의 일이다.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배가 출항할 수 없다. 특히 바람이 잦은 겨울에는 3 〜4일에 한번씩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주민들의 발을 꽁꽁 묶어 놓는다.
이같은 사정으로 주민들, 특히 젊은 사람들 이 모두 육지로 나가버려 섬에는 늙은 부모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손죽도에는 50〜60대 이상의 노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때는 근해 어업과 김 등을 양식했으나 젊은 사람들이 없어 그것도 하기 어렵다. 떠나버린 집터에 밭을 가꾸거나 산에 염소를 방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일거리에 불과하고, 이곳 주민들은 대부 분 육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매달 보내오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유일한 금융기관 우체국
손죽도의 공공기관으로는 우체국과 면출장소, 파출소, 손죽초등학교, 보건진료소, 통신무선국, 그리고 내연발전소 등이 있다. 그 중 금융업무를 다루고 있는 기관으로는 우체국이 유일하다. 이런 낙도에까지 우체국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으나, 이곳 손죽도우체국은 다른 우체국과는 그 설립 경위가 사뭇 다르다.
우체국이 없던 시절, 우편 • 금융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여수나 거문도까지 가야 했다. 그 당시에는 교통이 더 불편했으니 주민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박창관씨를 비롯한 섬 주민들이 여수우체국을 찾아가 이같은 사정을 호소하고 손죽도에 우체국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주민 수가 너무 적어 경제성은 없었지만, 주민들이 손수 부지 3백평을 마련하여 그곳에 우체국 건물을 짓고 기부체납을 함으로써 1981년 11월 우체국이 설립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시 손죽도 출신인 김일환 여수우체국 관리과장의 도움이 음으로 양으로 컸다고 주민들은 귀띔한다.
현재 손죽도우체국에는 김춘근 국장(7급), 계리원 김성곤씨, 도급집배원인 김영신씨 등 직원이 모두 3명에 불과하다. 1일 우편물량은 20〜30통이 고작이고 예금고는 3억5천만원 정 도이다. 이처럼 작은 우체국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매일 한번 들를 정도로 활용도가 매우 높다.
우체국의 탄생은 손죽도뿐만 아니라 인근 3개 섬 주민들에게도 큰 혜택이 돌아갔다. 이들은 여객선이 직접 닿지 않아 교통이 더 나쁜데, 가까이에 우체국이 생기자 사선을 이용해 이곳에 와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 손죽도 주민들보다 더 기뻐했다.
우체국을 통한 효도 실천
손죽도 주민들은 우체국이 금융업무를 다룬다는 데에 매우 고마워한다. 편지는 전화로 대신할 수 있지만 금융업무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경제 능력을 상실한 노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도시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보내오는 5만원이나 10만원 정도의 생활비로 살고 있어요 만약 우체국이 없다면 자식이 보내온 돈을 찾기 위해 금융기관이 있는 여수나 거문도로 나가야 하는데, 왕복 2만원 정도의 배삯은 물론이고 그날 배가 뜨지 않으므로 숙박비까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다 폭풍주의보라도 내리면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우체국은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일혼이 넘었다는 이종표씨의 이야기처럼 그들에게 우체국은 없어서는 안될 가장 소중한 기관이다. 따라서 그들의 우체국에 대한 고마움은 각별하다. 물론 면출장소나 보건진료소 발전소 등 다른 기관들에 대한 고마움도 없는 것은 아니나 우체국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다.
우체국이 자리를 잡아가자 주민들도 우체국에 좋은 제도가 많다는 것을 알고 더 자주 우체국을 찾았다. 쉽게 육지에 나가기가 어려우니 주변 사람들의 경조사에는 경조환을 이용한다. 경조금과 함께 인사말이 담긴 정성스런 카드까지 곁들일 수 있어 단지 경조금만 통장에 입금하는 것보다 훨씬 예를 차릴 수 있다. 또 우편주문판매제도를 이용해 각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주고 받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고추와 젓갈류를 주문해 김장을 하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섬에는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어느 노인은 육지에 사는 아들이 예금 • 적금과 세금을 대납해 주고 있다며 흐뭇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제도는 자녀가 우체국의 온라인종합통장을 개설하고 부모님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 우체국에서 사전 약정을 체결하면 예금 • 적금 및 세금 등은 자신의 통장에 자동납부되고 영수증은 부모님 앞으로 전달되는 것으로 우체국을 통해 작은 효도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므로 알아두면 매우 유익한 제도이다.
이처럼 우체국은 주민들의 수족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주민 수가 자꾸 줄자 우체 국마저 섬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기자가 취재를 위해 그들과 첫 대면을 했을 때, 주민들로부터 우체국을 없애려고 조사를 나온 것이 아니냐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들을 설득시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한참 후에야 오해가 풀렸다.
현재 정보통신부는 전국에 약 3천여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어 웬만한 농어촌이나 산간벽지 • 낙도까지 우체국이 없는 곳이 없다. 시중은행의 점포 수가 4〜5백개 정도임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규모이다.
점포가 농어촌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비율을 보면 우체국이 63%인 반면 은행은 7%에 불과 하다. 그러므로 우체국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우체국의 온라인망을 통해 우편 • 금융 서비스로부터 소외되기 쉬운 농어촌지역 주민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도 • 농간의 서비스 격차를 해소하고 있다.
유배생활 같은 근무 환경
이렇듯 우체국은 낙도에까지 퍼져 있어 소외 계층 주민들에게도 각종 편리한 우편 •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은 현대판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손죽도는 고립되어 있는 작은 섬이다 보니 섬 안에 문화 • 오락적 욕구를 충족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흔한 식당이나 여관 하나 없어요. 구멍가게가 둘 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좀처럼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집안에 있거나 노인정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전부지요.
상황이 이러니 우리 직원들은 외로움이 많이 생기는게 사실이에요. 가족도 생각나고요 그럴 때면 멀리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죠. 그러나 이런 생활을 유배생활로 생각하면 근무 못해요. 오히려 요양하러 왔다고 생각해야죠. 또 이런 소외계층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김국장의 말처럼 이곳 직원의 가장 큰 애로는 외로움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 보고 싶어도 교통이 여의치 않으니,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김국장의 경우, 집에 가는 경우는 한달에 많아야 한두번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나은 형편이라고 한다. 집이 여수에 있으니까 배만 타고 가면 금방 가족들을 만날 수 있지만, 멀리 내륙에 집이 있는 사 람은 그만큼 집에 가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섬에서 가까운 도시에 임시로 집을 마련, 가족과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듯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고충은 크지만 남들이 부임하기 싫어하는 곳이기에 그만큼 보람이 있고 자부심도 느낀다. 특히 명절 즈음에 주민들이 고맙다며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내놓을 때면 눈물이 핑 돌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3,400여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 유인도는 5백여곳에 이른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각종 문화 혜택을 제대로 못받고 있어 섬을 떠나는 주민들의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1년에 10개 이상의 유인도가 무인도로 변하고 있다.
이런 낙도 주민들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배려가 절실한 때이며, 복지국가에 걸맞게 우체국도 좀더 확산돼 이런 소외계층에게도 고루 혜택이 돌아갔으면 하는 것이 손죽도 주민들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