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준비하는 컴퓨터집배원
“컴퓨터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는데, 이제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1998년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입니다. 제15회 체신봉사상 본상과 모범공무원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그리고 청와대로부터 21세기를 이끌어갈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은 그런 해였죠.”
21세기의 신지식인, 그들은 어떤 학교에서 얼마나 공부 했는지와는 상관이 없다.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새로운 지식을 지속적으로 창조하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여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면 그가 바로 신지식인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이지만 독학으로 컴퓨터를 배워 8년간 자신이 맡고 있는 배달지역의 정밀지도 제작에 몰두하여 '집배영상정밀도라는 우편배달용 지도를 만드는데 성공한 여의도우체국 장형현(51세) 씨야말로 이 시대의 신지식인이다.
컴맹에서 컴도사로 변신
전남 순천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장형현씨는 가난을 벗어보기 위해 14살 때 서울로 무작정 상경, 막노동에서부터 신문 배달 등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다 이웃아저씨의 소개로 1974년 영등포우체국 임시직으로 정보통신부와 인연을 맺었다. 3년 6개월의 임시직 생활 끝에 큰아들이 태어나던 1977년 정식 직원으로 여의도우체국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기뻤습니다. 정식 공무원이 되고 박봉이지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어요.'
그는 전임자로부터 1개월 정도의 업무 인수를 받았는데, 그가 맡은 영등포구 신길동은 골목이 복잡해 우편물을 배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신참 집배원이 배치되면 몇 개월을 고생하고서도 그만두는 그런 악조건의 구역 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렵사리 얻은 직장이고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쉬는 날이면 집배구역을 돌며 연필로 자신만의 집배 정밀도를 만들 어 나갔다. 그것이 그가 만든 최초의 집배구역 지도였다.
그러다 1990년 2월, 장형현씨는 큰아들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286 컴퓨터를 사주면서 그의 컴퓨터 인생이 시작되었다. 옆에서 어깨 너머로 아들의 컴퓨터 조작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컴퓨터의 기본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틈만 나면 혼자서 컴퓨터를 켜놓고 이것저것 마구 눌러 보기도 해 고장이 나서 애프터서비스를 받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이것을 자신의 업무와 연계해서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은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여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컴퓨터의 기능은 너무 다양해서 나이가 든 그에게는 힘들고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실력이 늘면서 욕심도 커나갔다. 그때부터 컴도사로의 변신을 시작했다. 집배정밀도, 체신보험 신계약접수, 체신보험 수금현황표, 체신보험 납입통지서, 보험가입자의 주소 및 편지봉투, 보험가입자 안내문, 신길4조 번지현황표, 매일수금통장 등 일일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것을 컬러로 인쇄하여 고객에게 보내거나 동료 직원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제 15 회 체신봉사상 본상을 수상하는 장형현씨
그의 걸작품 집배영상 정밀도
“제가 만든 프로그램이 프린터로 인쇄 되어 나왔을 때 너무 신기 했어요.”
처음에 그는 보석글 프로그램으로 간단한 약도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포토숍과 같은 그래픽 프로그램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사진이 포함된 지도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컴퓨터 업그레이드 경력도 화려하다. 처음 산 AT급 컴퓨터를 얼마 지나지 않아 386으로 업그레이드 했고, 차차 펜티엄으로 바꿨다. 박봉에 컴퓨터 구입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번은 아내가 부엌 싱크대를 바꾸려고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컴퓨터를 바꾸기도 했다.
“저희 아저씨 밥은 굶어도 컴퓨터라면 정신을 못 차리죠. 오죽하면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을 붙들고 모르는 부분을 물을 정도이니까요.”
컴퓨터에게 남편을 빼앗겼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아내 안춘화씨는 가난하지만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얘기한다.
“어려웠어요. 프로그램 메뉴가 전부 영어로 되어 있으니 알 수가 있어야죠.”
기본적인 단어조차도 장형현씨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영어사전을 붙잡고 살다시피 했다.
“책을 읽어도 내용을 잘 소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가까운 컴퓨터 매장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물어 봤죠. 한번은 배달구역내의 중학교 전산 담당선생님 당직하는 날에 찾아가서 지도를 받기도 했어요. 그리고 공익요원으로 있는 대학생에게도 수시로 도움을 청했죠.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컴퓨터에 미쳤다'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그의 노력 끝에 탄생된 집배영상정밀도, 이것을 한번쯤 본 사람은 '정말 혼자서 만든 것이냐'며 모두들 놀란다.
그가 만든 집배영상정밀도를 컴퓨터 화면에서 클릭 하면 집배원 아저씨...' 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원색으로 그려진 지도가 여러 단계로 나온다. 거기에다가 일부 지역은 그가 사진으로 직접 찍어 이것을 스캐너로 읽어 들여서 편집된 사진까지 들어 있다. 또한 집배 순서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가상의 조그마한 사람을 만들어 그 사람이 움직이면서 배달 순서를 가르쳐 준다.
'선배님이 만들어 준 지도 덕에 신길동 지역 집배원들은 다른 구역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죠.'
이제 막 2년차의 신참 집배원 김종원씨는 집배영상정밀도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신문·방송에서 그가 만든 집배영상정밀도가 소개되어 나가자 정확한 지역의 위치 자료를 필요로 하는 119구조대나 국세청, 지방에서도 그것을 한번 참고할 수 없느냐는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신참 집배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우편배달용 지도 집배영상정밀도
장형현씨가 8년간 공들여 만든 집배영상정밀도의 초기화면
컴퓨터집배원의 생활 신조
“몇 번지 누구세요. 지금 들어오셨어요. 곧 가겠습니다.”
장형현씨가 휴대폰을 받을 때 하는 말이다.
종일 집을 비우는 맞벌이 부부가 증가 하는 요즘, 완벽한 배달을 위해 한달 월급과 같은 돈을 주고 2년 전에 휴대폰을 구입했다. 주인이 없을 경우 우편물 겉봉에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적어 놓아 수취인이 문의하면 언제라도 응답하고 있다. 우편 배달도 이제는 고객을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단순한 집배원 아저씨가 아니라 생활 불편을 해결해 주는 행정처리요원이다. 배달을 다니다 상하수도나 도로가 파손된 것을 발견하면 행정기관에 일일이 신고해 보수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는 만능 심부름센터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바쁜 주민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으며, 각종 공과금이나 예금·보험 업무도 처리해 주고 있어 이동은행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20년 넘게 이곳을 배달 하다 보니 주민들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주부들을 보고 우체국장에게 건의하여 우체국 자체에서 「장한 어머니 체신상」을 만들어 3년째 상을 주고 있다. 그 동안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한 며느리, 남편이 병으로 쓰러지자 이발소에서 일하며 남매를 키운 어머니 등을 추천해 상을 받게 했다.
이러한 생활 태도로 주민들의 신망을 쌓은 그는 지난해 우체국 보험 상품에 300명이나 가입시켜 1,600만원의 특별상여금을 받기도 했다.
올해로 집배원 생활 24년째를 맞는 장형현씨. 지금까지 1건의 우편사고도 없었고, 매일 컴퓨터를 만지고 있어 동료들로부터 「컴퓨터 집배원」이라고 불리워 진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 왔을 때 막막했어요. 하지만 한번도 남을 탓하지 않으며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하는 편지 한 통에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편물을 제대로 서비스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죠.”
신지식인 선정 소식이 알려지면서 갑자기 유명인이 된 장형현씨. 앞으로 자신이 만든 지도에 사진과 음악·동영상을 추가하여 자신의 집배구역뿐 아니라 서울, 나아가서 전국 배달지역의 정밀도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단지 바람이 있다면 집배실에도 그래픽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가 지원되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후배 들에게 가르치고 싶다고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