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잃다
“기억하는 이미지는 거의 없어요. 그저 형체적으로 사람이구나, 자동차로구나 정도를 알 뿐이지 그 외는 또렷하게 보이는 것도 기억하고 있는 것도 희미해요. 당시만 해도 미숙아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이 ‘미숙’했던 것 같아요. 인큐베이터도 지금처럼 좋지는 않았을 것 같고요. 애기 때부터 시력이 완전하지 않았으니까 기억하는 이미지가 별로 없어요.” 1985년생인 명수 씨는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균감염과 적절하지 않았던 빛 등의 이유로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고 했다. 수술도 하고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지만 차즘차즘 떨어지기 시작한 시력은 다섯 살 무렵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한다. 볼 수 없는 대신 소리에 대한 예민함이 주어진 것일까, 명수 씨는 어려서부터 소리에 남다른 감각을 보였다고 한다. “장난감을 갖고 놀아도 꼭 소리가 나는 장난감만 갖고 놀았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볼 수 없으니 소리로 재미를 대신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어려서부터 발달한 소리에 대한 감각은 성장하는 내내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스물아홉 나이에도
순수한 미소를 간직한
명수 씨.
음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생애 첫 피아노
다섯 살 명수는 어느 날 엄마와 외삼촌 댁에 들러 우연히 건반을 치게 되었는데 건반소리에 흠뻑 빠져 오래도록 의자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놀았다고 한다. 삼촌의 배려로 그날 집으로 건반을 가져왔는데, 그때부터 어린 명수는 종일 건반을 치며 놀았다고.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8살 무렵, 피아노학원에서다. 악보를 볼 수 없었지만 선생님이 음을 들려주면 명수 씨가 따라치는 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다행히 소리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를 익숙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뭔가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어느 정도 커서는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에서 반주도 하고 행사 때 요청이 있으면 연주도 하고요. 꾸준히 피아노를 치고 연주할 기회가 있었어요. 제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이 제일 즐거웠다는 정명수 씨. 당시에는 테이프 하나 주고 연주해달라는 것이 어렵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런 순간들이 쌓여 자신을 있게 한 것 같다고 한다. “악보를 볼 수 없으니까요, 주로 찬송가 테이프를 듣고 연습하고 연주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소리로 먼저 듣고 편곡을 하거나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요.”
언제 어디서든
명수 씨에게
음악은 친구
같은 존재다.
재즈에 빠지다
정명수 씨는 한빛맹학교를 다니면서 대다수의 시각장애인이 그랬던 것처럼 안마를 필수과정으로 배웠다.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명수 씨는 말했다. 한빛맹학교를 졸업하고 삼육대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그의 마음속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다. 틈틈이 하는 안마 일은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이렇게 살다가 나란 존재가 그냥 잊히지지는 않을까?’ ‘작곡이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이 맞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기를 여러 차례, 고민 끝에 그는 일과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피아노만 쳤다. 연습실이 필요했는데, 누군가 실용음악학원에 가면 연습실이 있다고 해 물어물어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재즈를 접하게 되었고, 노래를 하게 되었다. 실용음악학원의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그때까지는 클래식음악을 주로 연주했어요. 재즈라는 것을 처음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재미있게 배우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한 달여 만에 그만두시는 바람에 그때부터는 저 혼자 독학을 했어요. 밥 먹고 피아노치고, 피아노치고 밥 먹고 그렇게 하루 10시간 이상을 피아노만 붙잡고 있었죠.” 명수 씨는 피아노는 물론이고 기타를 비롯한 악기를 거의 독학으로 배웠다. 물론 처음 시작을 도와준 선생님들은 있었지만 익숙해질 무렵이면 유학을 가거나 학원을 옮겨가거나 해 인연이 오래 닿지를 못했다고. 하나하나 혼자 배우고 터득한 만큼 음악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깊은 그이다.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그런 것처럼 똑같이 안마를 하다, 아무도 모르게 잊혀질 것 같아 두려웠다는 명수 씨. 끊임없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으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은 여전히 힘들지만 그는 이제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한다.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에.
슈퍼스타 명수 씨
뒤늦게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을 했다.
그것도 일반전형에 수석으로 말이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하기에 그의 실력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어서 지원했지만 수석으로 입학하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는 명수 씨.
그간 희망방송국에서 활동하며 희망새중창단 2집 앨범을 프로듀서 했고, 크고 작은 연주회를 열기도 하고 참여하기도 했던 그. 몇 해 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최한 연주회가 가장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저도 분위기 탓인지 좀 흥분을 했었던 것 같아요. 500여 명의 청중께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어요. 제 이름을 걸고 하는 연주를 빠른 시일 내에 또 열 수 있었으면 해요.”
그날 수익금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용될 수 있도록 기부를 하기도 했다. 스스로도 어려운 환경이지만 자신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가진 재능을 나누는 명수 씨. 그 공연이 계기가 되어 SBS ‘스타킹’에도 출연을 하게 되고 케이블채널 프로그램 ‘슈퍼스타K3’에도 출연, 심사자들과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치열하게 피아노를 치며 비로소 참다운 자신을 발견한 명수 씨에게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었다. 그동안 음악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일로서 음악을 한 것 같다는 명수 씨, 남은 학기 수업에 매진하며 다시금 그만의 음악을 만들어 보이고 싶다고 한다.
합창수업.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소리 내고 노래하는 시간이 더없이 재밌고 즐겁다는 명수 씨.
스물아홉 명수 씨의 꿈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두 가지 어려움과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 장애를 극복하고, 원하고 꿈꾸는 바를 실현하는 일은 아마도 일반인보다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정명수 씨는 지금, 그 모든 어려움과 불편을 이겨내며 조금 더디지만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음향장비를 설치하다 전기에 감전될 뻔한 적도 여러 번, 지하철 역사에 발을 헛디뎌 떨어져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소리신호 없는 횡단보도를 옆 사람 건너는 소리에 따라 걷다 차에 치일뻔한 적도 여러 번. 명수 씨는 음악 하는 꿈을 위해 오가는 많은 길에서 때때로 위험한 상황을 겪으며 좌절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음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희망을 품었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제 감동을 전하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명수 씨. 자신만의 CCM앨범을 만들고 싶고, 프로듀서로서의 꿈도 펼쳐 보이고 싶다는 스물아홉 재즈피아니스트 명수 씨의 삶은 오늘도 맑음, 내일도 맑음일 것이다. 한동안 롤모델이 있었지만, 흉내만 내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지 못할까 하는 고민에 이제 롤모델을 정하기보다 자신만의 음악을 꿈꾸며 음악을 만들고 있는 명수 씨. 꼭 명수 씨만의 음악을 만들어 대중과 더 깊게 소통하는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