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여행을 시작하다
파비앙이 한국 문화를 처음 접한 건 5살 때였다. 엄마의 권유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파비앙의 눈에 보이는 한국 문화는 모든 게 신기했다. 도장에서 처음 본 태극기도, 낯선 외국어도 새로웠다. 10살 때 도복에 쓰여 있는 ‘태권도’라는 글자를 삐뚤삐뚤 따라 그리기도 했다. 태권도를 통해 바라본 한국은 따라 쓰고, 그리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태권도를 배울 때 한국말을 쓰잖아요. 들으면서 어떤 뜻인지 궁금했어요. 억양도 듣기 좋았고, 한글도 예쁘다고 생각했고요. 제겐 신기한 언어였어요.”
호기심 많은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대학을 한 학기 앞두고 여행을 계획했다. 그가 가고 싶은 나라는 한국이었다. 3개월간 머물 돈을 모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여행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음식도 맛있고, 좋은 친구도 만났다. 틈틈이 태권도를 배우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여행이 끝날쯤 아쉬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더 깊이 한국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모국으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한 파비앙은 고민에 빠진다. 프랑스에 남아 자신이 하고 싶은 연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문화를 더 깊이 체험할 것인가. 파비앙은 5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하며 수고한 자신에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자신을 위한 진정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 문화에 빠져들다
한국에 온 후 1년간 이화여대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에서의 삶은 만족스러웠지만, 가슴 한쪽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연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연기를 하려면 언어가 통하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하지만 파비앙은 연기도, 한국도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에 머물면서 연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고민 끝에 그는 대학로에 있는 극단에 찾아갔다. 처음에는 언어의 벽에 부딪혀 힘들었지만, 결국 그의 열정은 그를 무대 위로 올려놓았다. 2년 반 동안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드라마 촬영을 했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면서 서서히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한 여행을 하며 새로운 기회를 만든 것이다.
기회는 또 다른 기회를 불러왔다. 미식가의 나라 프랑스에서 온 파비앙은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혼자 살며 요리를 하다 보니 실력이 조금씩 늘었고, 가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이 만든 음식 사진을 올렸다. 한식에 대해 알면 알수록 빠져들었다.
'한식의 매력은 다채롭다는 거예요. 맛도 좋고 색깔도 예뻐요. 모든 음식에 역사나 문화가 있잖아요. 비빔밥은 자기가 수확한 것을 나눠서 밥에 비벼 먹는 품앗이 풍습에서 왔다고 들었어요. 재미있지 않나요?'
그는 꾸준히 자신의 레시피를 정리해 놓았고, 프랑스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식을 소개하고 싶었다. 프랑스에 친한 작가 소개로 출판사와 연락이 닿아 자신이 정리한 레시피를 보여주었고, 2016년 프랑스에서 《파비앙의 한식》을 발간했다. 프랑스에 한식 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점이 좋았고 판매 순위도 높았다고 한다. 그의 대화 속에는 ‘재미있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모습이 긍정적이고 건강해 보였다. 그렇게 파비앙은 점점 한국 문화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알면 사랑한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글쓰기’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쓰는 걸 좋아했어요. 요즘 한국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컴퓨터에 쓰지 않고 직접 손으로 써요. 편지도 많이 쓰는 편이에요. 편지 부치러 우체국에 자주 가고요. 프랑스 우체국에 비해 한국 우체국은 천국이에요. 빠르고 친절해요. 프랑스 우체국은 느리기로 유명하죠.”(웃음)
빠름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그를 보며 이미 한국 문화에 완벽히 적응한 것 같았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북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첫 번째 손님으로 입장해 반나절 이상 책을 읽는 날도 왕왕 있다. 요즘 읽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한국 역사 교양서를 소개해줬다.
“한국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됐어요. 그전에는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었어요. 속도가 느리고 이해하기도 어렵고요. 꾸준히 연습하다 보니까 1년 전부터 어느 정도 속도가 빨라졌어요. 한국에 10년 정도 살았는데 제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싶었어요. 인생이 재미있죠?”(웃음)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열고 대상을 이해하면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파비앙에게 한국은 그런 존재였다. 5살 파비앙의 눈에 한국 문화는 온통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마음을 열었고,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한국을 이해했다.
“태권도만 봐도 한국 문화가 녹아 있어요. 한국의 열정, 정서, 포기하지 않는 정신. 10년 전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20대 초반의 파비앙의 눈에 한국은 모든 게 빠르게 움직이고, 열정 가득한, 가능성이 많은 나라로 보였어요.”
그에게 한국은 ‘가능성’이자 ‘희망’이었다. 한국에 산 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젠 한국 문화를 모국에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다. 30대가 되면서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파비앙.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열정과 젊음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Profile
파비앙(Fabien, 최윤)
1987년 生 프랑스 출생
2009년 ~ 현재 <서바이벌 한식왕> 외 다수 방송 활동
2010년 연극 <블라인드 시즌 2> 슈텐버그 역
2014년 MBC 방송연예대상 올해의 뉴스타상 수상
2014년 청년공공외교단 명예단원
2016년 《파비앙의 한식》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