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명가를 이어가는 정순임 명창
“집 나갔던 정신이 이제 좀 돌아온 것 같네요. 하하! 집안의 경사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에게 판소리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된 것같아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4호인 판소리 명창 정순임(66세) 씨는 지난해 반년 정도를 정신없이 보냈다. 연이어 내로라하는 무대에 불려 다니면서 특별공연을 펼치다보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지난 해 유월, 대대로 국악 명인을 배출해낸 집안의 공적이 인정돼 문화관광부로부터 전통예술 판소리 명가(名家) 1호로 지정받았기 때문이다.
정순임 명창 가계는 호남에서 활동한 거문고와 피리의 명인 장문근 선생을시작으로 어전명창이었던 큰외조부 장판개 선생, 어머니 장월중선 선생에 이어 4대가 124년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장판개 선생의 여동생 장수향 선생은 판소리와 가야금의 명인이었으며, 장판개 선생의 남동생 장도순 선생은 판소리 명창으로서 당대의 여성 소리명창 이화중선 선생의 스승이었다. 장도순 선생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딸인 장월중선 선생은 한번 들은 소리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가히 천재성을 타고 났었다.
“어머니는 판소리는 물론이고 가야금, 장고, 춤, 연기 등다방면에서 천재적인 재주를 가진 분이셨어요. 나 애기 때부터 어머니 소리를 듣고자 찾아오는 귀명창도 솔찮았죠.어린 귀에도 어머니 소리며 춤이며 연주 솜씨가 참 좋아서 흉내 내곤 했는데 그걸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거라…. 어린 내가 판소리 자락을 흥얼거리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셨으니까! 그 시절만 해도 여자가 소리하며 산다는 것이얼마나 신산스런 것인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계셨으니까 그러셨던 게죠. 그런데나는 너무 너무 소리가 좋아서 엄마가 마실가면 동네 아이들 죄다 불러놓고 창극하며 놀았어요.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이불에 댄 비단, 뉴똥, 공단 같은 옷감을 뜯어 의상까지 만들어 갖고 제대로 창극을 했죠.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예닐곱 살 어린 나이의 소녀는 매일 새벽 4시면 고향 목포의명산 유달산에 올랐다. 어머니 몽둥이를 피해 귀동냥으로 들은소리를 마음 놓고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달산에는 새벽부터 찾아와 소리와 시조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장년, 중년의 어른들 틈에서 적벽가∙춘향가∙수궁가∙흥보가를부르던 소녀의 열정은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말하자면 딸 고집이 엄마 고집을 이긴 것이죠. 당신도 대대로 전해오던 피의 부름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끼셨던 분이니 제안에 흐르는 피의 향방도 잘 아셨을 테고…. 제게 소리를 허락하시면서부터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스승이 되어주셨어요. 스승으로서의 장월중선 선생은 진정한 예인이셨어요. 14살 무렵에는 임춘행 선생이 이끄시는 여성극단에 보내주셨어요. 거기서 서동과 선화공주, 견우직녀, 수궁전, 구운몽 같은 창극의 도창(해설하며 이야기를 시종일관 이끌어가는 창)을 맡기도 했어요. 감성이 풍부하던 사춘기 시절에 배운 소리들은 아름다움에대해 새롭게 눈뜨게 만들어주었어요.”
소리의 날개를 막 펼치려던 꿈나무는 좌절을 맞는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당시는 너나없이 가난했고 예인들도 설 자리가 없었다. 정순임 명창은 10년 정도를 무대를떠나 생업에 매달렸고 1966년 경주시립국악원 창악 강사를 맡으면서 다시 판소리의 세계에 투신했다. 그이 재능은 제4회 전국판소리경창대회 대상(1981), 제3회 전국국악대제전 판소리부장원상(1985), 전국남도예술제 판소리부 특장부 대상(대통령상, 1985) 등에서 입증되었으며 이후 1989년에 박송희 선생 문하에 들어가 흥보가를 배워 2005년 3월 제5호 중요무형문화재인 박녹주제 <흥보가>의 이수자가 되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소리꾼은 무대에 설때와 제자를 가르칠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무대에 서는 사람은 관객과 기를 나누고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과 기를 나누는데 나는 그 순간이 참 좋아요. 마음이맞는 사람과 소리의 멋에 취해있는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힘든 감동이죠.”
소리의 세계는 소리를 뛰어넘는다. 하여 청각장애 2급이라는육신의 장애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어릴 적에 물놀이를 하도 좋아해서 물에서 얻은 균이 온 귀에 퍼지도록 몰랐어요. 그래서 청력을 많이 잃었죠. 보청기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청각장애는 아무 문제없어요. 소리하는사람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겁니다. 베토벤도 청각장애를 무릅쓰고 세계적인 음악을 만들었잖아요?”
태어난 고향인 목포를 떠나 빛나는 청춘을 바친 경주에서 소리교실을 열어 가르침의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인생의 황혼녘에 저물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는 나이를 거슬러 올라 꽃다운 심청이가 되기도 하고, 유관순 열사가 되기도 하고, 구운몽의 성진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허명을 알리기보다 가르침의외길을 걸어온 것은 어머니의 그늘이 컸기 때문이다. 장월중 선선생은 호남에서 국악 기반이 전무했던 경주 지역에 와 씨를 뿌렸고, 서울 진출을 수없이 권유받았지만 마지막까지 경주에 머무르며 후학을 배출하고 경주 국악을 전국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리를 하고 싶다는 명창의 웃음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