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채도와 명도가 한껏 높아지는 봄. 바람 많은 제주의 봄은 씻어낸듯 유난히 청명하다. 요즘처럼 볕 좋고 바람도 맞춤일 때 양순자(60세) 씨는 제주갈옷을 만드는 갈천을 물에 축여 풀밭에 널고 빛과 바람을 쐬게 하면서 색 내기 작업에 몰두한다.
명월대가 바라다보이고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한 아름다운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지금은 폐교가 된 명월초등학교에 양순자 씨의 작업실이 있다. 제주 토종 풋감으로 물을 들인 갈천은 한두 번 물들이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색 내기 과정을 거듭해야 제주갈옷의 제 빛이 살아난다. 양순자 씨는 날 좋은
때를 기다려 지난 여름 수차례 물을 들여 보관해 두었던 갈천을 볕에 널고 물에 적셔가며 색을 낸다. 색 내는 일은 보통 열흘 정도 걸리는데 날씨에 따라서 열다섯 번을 반복하기도 한다.
“풀밭에 갈천을 널어 말리다 보면 아침이슬이 머물던 자리의 습도가 곳곳마다 달라서 색의 강약이 만들어지고 풀 무늬가 찍히기도 해요. 풀벌레들의 흔적이 묻어나기도 하고요. 그 무늬와 색감은 볼 때마다 경탄스러워요.”
20여 년 간 고향을 지키며 천에 감물을 들이고 그 천으로 갈옷을 지어온 양순자 씨는 자신이 하는 일은 농사짓는 일과 다름없다고 한다. 돌밭이었던 제주의 땅을 개간하여 5,500여 평의 과수원을 만드는 일이나 그 땅에 제주도 토종 풋감나무를 심고가꾸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자연의 건강함을 담은 갈옷이 좋아 시작한 일이니 감나무 밭에 농약 한 방울 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몸을 고달프게 했다. 그렇게 남다른 농부의 정성으로 가꾼 감나무에 풋감이 맺기 시작하면 양순자 씨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고 한다. 풋감이 5백 원짜리 동전 만해지면 그는 예의 농부의 부지런함을 발휘한다. 농사는 때가 중요한 법, 갈천 물들이는 일도 때를 놓치면 끝장이다. 풋감에 단물이 돌기 시작하면염료로 쓰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연과 더불어 호젓하게 세상사와 거리를 두고 사는 듯한 양순자 씨의 과거는 화려하다. 뉴욕 패션계를 놀라게 한 패션디자이너였던 그는 디자이너들이 선망하는 미국 FIT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의 디자인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각광받았으나 그 화려한 찬사를 뒤로 한채 30대 후반의 나이에 15년의 뉴욕 생활을 마무리했다. 섬을 떠나니 섬이 보였고 고향을 떠나니 고향이 보였다. 디자이너인 그에게 풋감이 자아내는 갈색이 고향의 색, 가슴에 사무치는 색으로 다가 왔다.
“자연의 색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무연하게 느꼈던 갈옷이 나이가 들면서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주위에서는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저를 많이 걱정했지만 저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나이 들수록 용기가 더 생기는 것 같아요.”
제주갈옷은 오래전부터 노동복으로 전해 내려왔다. 농업이나어업, 목축업에 종사하는 제주도 서민들의 작업복이자 일상복이었던 갈옷은 언제부터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350여 년 전 매장된 시신의 관속에서 풋감 즙으로 염색한 면이 나와 그 시기에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수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옷이라면 다 까닭이 있겠죠? 풋감의‘카테콜 탄닌’성분은 고운 자연의 색을 낼 뿐만 아니라몸에도 이롭습니다.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이 있는 분들도 갈옷을 좋아하시죠. 갈옷은 들에서 일을 하다가 비를 맞아도 몸에들러붙지 않아 편리해요. 땀 냄새가 나지 않고 오물이 붙어도잘 떨어지니 위생적이고 모기도 달라붙지 않아요. 세탁하기도 쉽고 옷감이 더 질겨져요. 게다가 오래 입을수록 아주 엔틱한 깊은 색이 우러납니다.” 그동안 양순자 씨는 갈천 물들이는법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전국의 천연염색가를 찾아다녔고, 염색의 대가로 소문난 중국 한족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중국도 누볐다. 그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면서 제대로 된 갈색을 찾아온 날들은 양순자 씨의 값진 자산이 되었다. 그의 갈옷은 2000년 우수공예문화상품 100선과 2003년 한국문예진흥원 기념품공예대전에서 각각 특선을 수상했다. 제주의 색에 매료된 일본시장에서 그의 갈옷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이젠 유럽 시장에서 갈옷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갈옷의 독특한 자연색상에 찬사를 보낸다고 한다.
입을수록 빛이 바래지 않고 더욱 깊은 색을 내는 갈천처럼 양순자 씨는 자신의 인생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물들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