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역사의 부름 앞에 머뭇거림 없이
1919년 3월 1일 신촌역 앞,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 쪽머리를 한 여성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고 있다. 결의에 찬 눈빛과 절박한 표정으로 때가 왔다는 듯이. 그녀는 막 편지 한 통을 받고 경상북도 영양에서 서울로 올라온 상태였다. 그 편지에는 ‘3월 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된다’ 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던 것은 독립선언서였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쳤던 여성. 그 여성은 바로 남자현 열사다. 우리는 이미 영화 <암살>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녀 외에도 수백, 수천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왜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극히 소수일까? 이제라도 제대로 그녀들의 공을 역사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심옥주 소장의 ‘한국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우연히 윤희순 열사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 윤희순 열사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안사람으로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었다. 심옥주 소장은 여성이 의병단을 꾸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도 국내에서 25년, 중국에서 15년 동안 독립 활동을 했고, 자신의 시아버지부터 남편, 아들에 이르기까지 몇 대에 걸쳐 독립 정신을 이어 갔으며, 노학당을 꾸려 독립 인재 양성에 헌신한 윤희순 열사. 심옥주 소장은 그녀의 삶의 궤적을 쫓아 무작정 부산에서 강원도로 향했다.
“여성이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어요. 독립 정신은 의병에서 시작되거든요. 이 정신은 광복군으로, 국군으로 이어져요. 여성이 의병을 했으니까, 분명 독립운동도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자료를 찾아보니 그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가 200여 분이 넘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유관순 누나’만 알고 있는 거죠. 한국 여성의, 한국 어머니의 가열한 독립운동, 이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세상에 알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현장을 계속 찾아다니면서 역추적해야 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큰 틀에서, 여성 독립운동사를 알아야 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역 독립운동사를 알아야 했다. 노력 끝에 빛바랜 여성의 독립운동 활동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옥주 소장은 2년 동안 강원도 일대를 누비며 연구하여 《윤희순의 민족 운동에 관한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도산 안창호의 정치 철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그와 관련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했다. 2009년 3월 1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를 설립했고, 내년이면 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째가 된다. 심옥주 소장은 우연한 역사의 부름 앞에 머뭇거림 없이 10년을 향해 달려왔다. 10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번엔 심옥주 소장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자.
기억해야 할 역사는 지금, 여기,
아이들의 손끝에
한국 여성 독립운동에 대해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단체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가 처음이다. 현실적으로 자료를 찾기 어렵고 운영상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심옥주 소장은 멈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서는 학술적으로 뼈대를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꾸준히 연구하여 『통일의 길, 한국여성독립운동에서 찾다』, 『한국여성독립운동과 국가 보훈』,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연구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소통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부산에서 활동할 때는 고등학생, 대학생들과 동아리 활동을 운영하며 함께 이야기했고,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 앞에서 ‘한국 여성 독립 활동’에 대해 강의를 한 후 학생들이 즉흥적으로 떠오른 영감을 화폭에 옮기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때 완성된 서른세 폭의 작품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제 보물 한번 보시겠어요? 학생들이 그린 작품들이에요. 목숨을 바쳐 지킨 이 나라의 미래들이, 그들의 손끝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했어요. 이 작품들은 수차례 순회를 하며 전시 중이에요. 올해 8월 14~15일에는 서대문형무소 야외에 전시될 예정이고요. 11월에는 국회에, 내년에는 해외에도 전시할 예정이에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이 그림이 이렇게 널리 전시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아이들에겐 얼마나 값진 경험이겠어요. 저는 이게 참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상반기에는 서울교육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여성독립운동학교-여독스쿨’을 운영했다. 여독스쿨은 중·고등학생이 모두 참여하는 수업으로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강의뿐만 아니라, 전통 자개로 수저에 태극 문양을 새기는 활동, 조선어학회 한글 수업 등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프로젝트다. 여독스쿨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소장은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을뿐더러 관련 부처의 후원도 적극적이어서 굉장히 뿌듯했다고 전했다.
“과연 이게 될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학생들을 보는 순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형화된 모습이 아니더라고요. 신이 나 보였어요. 수료한 학생들 중에서 일부는 독립영웅기자단을 꾸렸어요. 보폭을 넓혀서 여성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궁금한 것을 찾고 학습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거죠. 내년에는 학생들의 글을 모아서 책으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심옥주 소장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기억해야 할 역사는, 지금, 바로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듯이.
한국 여성 독립운동을 세계로
19세기 말은 혼란의 시대였다. 이 땅에 근대화의 물결이 들어왔고 전통과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충돌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 학당인 이화 학당이 생겼다. 교육을 받으면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여성 또한 의병이 될 수 있었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국내 항일운동부터 3·1운동, 문화운동, 학생운동, 중국과 만주, 미주 등 해외 독립운동, 임시정부 활동 등 분야와 장소를 막론하고 ‘대한 독립’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잠시 마음을 헤아려보자. 자신의 아들 안중근에게 “나라를 위해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어라”라고 편지를 썼던 조마리아 여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 열사는 임신 7개월 차였다. 남자현 열사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독립운동계여 단결하라!”며 혈서를 썼다. 그녀들이 이렇게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건, 지키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의 미래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8년 3월 1일 기준으로 298명(1명이 누락되어 정확히 299명)이 여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전체 독립운동가 1만 4,800여 명 중에 2%도 채 되지 않지만, 그녀들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영역이 굉장히 넓었어요. 하지만 지금껏 우리는 그걸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해요.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예요. 한 세대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제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그 과정에서 우체국의 역할 또한 크죠. 소통의 매개체니까요. 3·1운동 당시에도 편지로 긴밀하게 민족이 하나가 되었고요. 저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우체국에 가는 것 같아요.” 1919년 3월 1일, 신촌역 앞에 간절히 다가올 봄을 기다리던 여인이서 있었다. 그녀는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간절히 대한 독립을 꿈꾸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그 꿈이 이뤄졌음을,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봄이 왔음을, 감사의 마음을 담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세계에 그녀들의 위대한 희생을 알릴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발걸음을 주목해보자.
Profile
부산대학교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철학박사 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전 부산대학교 교육인증원 조교수
2016년 제15회 유관순상 수상
2015년 한국보훈학회 학술상 표창
2009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