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나의 사랑방, 책방이듬
책방의 이름은 책방이듬이다. 이 책방의 주인, 김이듬 시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듬’은 ‘이듬해’의 이듬을 일컫는 순우리말로 ‘바로 다음’이라는 의미다. 이 말에서 사뭇 평안함이 느껴졌다. 마음을 현재가 아니라 차후에 둔다면,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잠시라도 마음을 비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비워진 마음에는 새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다. 마음이 새로워진다면 다시 무언가를 채울 용기를 얻는다. 용기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든다. 책방 문턱을 넘어서면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모든 사람이 나의 서재나 나의 공부방처럼 편하게 왔다가는 곳 이었으면 좋겠어요. 인간적인 만남이 많이 사라진 시대잖아요. 이곳에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취미를 이야기하고, 슬픔도 이야기하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되기를 바라요. 책방에서 독서도 하고, 리포트도 쓰고, 낭독을 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장 어떤 일이벌어지지 않아도 10년 후에 그 작가의 단골 카페가 이곳이었다더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요. 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모든 사람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책방 문턱을 낮춰야 했다. 그래서 책방지기이자 김이듬 시인은 손님에게 먼저 다가섰다.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어울릴 법한 책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고민이 있는 손님에게는 상담을 하며 ‘책 처방’을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책 처방을 받았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연히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을 서로 소개해주기도 한다. 책방 문을 연 지 1년 새, 책방이듬은 누군가에겐 가끔 안부도 전하고, 우연히 꿈을 발견하고, 다가올 우연을 기다리는 모두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이 되었다.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나
김이듬 시인이 시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은 곳 또한 작은 공간이었다. 중학교 시절, 시인은 아버지를 따라간 이발소에서 푸시킨의 시를 보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최선 옮김, 민음사) 이 시에 대한 첫인상은 강렬했다.
“그때 그 시를 읽으면서 이게 시구나, 시라는 게 멋있는 거구나, 나도 지금 슬픈데 인생이란 건 원래 슬픈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춘기 시절에 저는 책을 통해 꿈을 꿨고, 친구도 찾았고, 이름만 들어본 스웨덴도 가봤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학교 백일장 같은 데서 제가 1등을 했거든요.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셔서 ‘네가 쓴 시가 너무 좋다. 너는 좋은 작가가 될 거다. 이렇게만 쓴다면 한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될 거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은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소녀의 마음에 새겨진 ‘시’라는 세상은 점점 커졌다. 멈추지 않고 문학 세계를 탐험했고 글을 썼다. 그리하여 2001년 계간 포에지에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로 등단했다. 그 후로 《별 모양의 얼룩》, 《히스테리아》 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최근에는 《표류하는 흑발》을 선보였다. 시집 이외에도 슬로베니아에서 머물면서 쓴 《디어 슬로베니아》, 파리지앵들과 인터뷰하여 엮은 《모든 국적의 친구》 등 산문집을 펴냈다. 시를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그녀에게 시의 매력은 무엇인지, 시를 즐기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화요일 밤마다 이곳에서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나’라는 주제로 시 창작 강의를 해요. 이 주제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저에게 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왜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잖아요. 그것과 같아요. 시를 즐기는 방법은 생각보다 쉬워요. 우리가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거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그저 그 느낌을 가져보고 즐기잖아요. 시도 쉬우면 쉬운 대로, 난해하면 난해한 대로, 그대로 즐기면 돼요. 하지만 사람들이 예술이 언어로 쓰이면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이건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죠.” 책방이듬에서는 시와 문학, 삶에 대한 질문과 지혜가 낭독되어 문턱 밖으로 흘러나온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물음이자 울음이자 웃음이다. 그 언어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혼돈에서 발견되어 예술로 잉태된다.
“사람들은 완성하기를 바라고, 평온함이나 힐링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저는 카오스(혼돈)에 관심이 많아요. 책방이듬 간판 아래에 니체의 문구를 써 놓은 이유이기도 해요. ‘You need to
chaos in your soul to give birth to a dancing star.(춤추는 별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모든 걸 가진 완전체, 모든 걸 깨달은 선각자이면 좋겠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잖아요. 미완성인 삶을 살아요. 헤매고 방황하는 것이 살아 숨 쉬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카오스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자기 안에 춤추는 별을 잉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세요, 시가 꽃피는 세계로
책장에는 문학과 예술, 인문 교양서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중 오분의 일 정도는 김이듬 시인이 대학 시절부터 한 권씩 모아둔 책도 있다. 책장에서 희귀본과 초판본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기계발서나 수험서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는 책보다 자유와 사랑, 존재와 존엄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많다.
매달 2~3회씩 진행하는 ‘일파만파 낭독회’도 책방이듬의 또 다른 특징이다. 낭독회에서는 한국의 좋은 작가들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 책방지기인 김이듬 시인은 가끔 작가들을 초청하기 위해 손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러면 손편지에 감동하여 흔쾌히 낭독회에 오는 작가들도 있다고.
“얼마 전에 한 소설가 선생님을 섭외했는데 손편지를 썼어요. 선생님께서 카톡이나 전화로 하면 청을 안 들어줄 텐데 손편지를 받아서 아무리 바빠도 낭독회를 하기로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오래간만에 받은 편지라 고맙고 뭉클했다고. 문명화된 세계에서 손편지가 가지고 있는 힘은 크다고 생각해요.” 책방이듬에서는 낭독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 최근에는 법조인 작가를 초청하여 생활 법률에 대해서 주민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독서 모임도 있으며, 시 창작 수업도 있다. 작년에는 와인 모임도 있었다고 한다. 책방이 일종의 문화 발전소처럼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올 10월 혹은 11월에는 책방이듬에서 만든 문학계간지 <페이퍼이듬> 창간호가 출간될 예정이다. <페이퍼이듬>은 보통의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문학잡지로, 등단, 비등단을 가리지 않으며, 86편의 원고 중에서 엄선된 작품이 실릴 예정이다. <페이퍼이듬>의 표지 모델 또한 책방 손님으로 선정되었다. 표지 모델의 사진도 책방에 온 포토그래퍼가 찍었다. 표지로 사용될 사진 속에는 여학생이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님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곳에 들어오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다’라고요. 책방 문턱 밖에는 차별도 많고 돈의 원리로 돌아가지만, 여기에 들어오면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어요. 사색하고 글을 쓰며 때론 친구를 만나거나 연인을 기다리기도 하고요. 저는 책방이듬이 수평적인, 인문학적인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책방이듬에는 책과 어울리는 모든 것들이 있다. 향긋한 커피, 시인과 음악. 스피커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 장미빛 인생)가 흘러나왔다. ‘당신의 가슴으로 날 끌어안을 때면 (…) 장미가 꽃피는 세계로 빠져버린다’는 노랫말처럼, 올가을 책방이듬의 문턱을 넘어 시가 꽃 피는 세계로 빠져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잊지 못할, 나만의 단골 책방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Profile
2017년
책방이듬 설립
2016년
<디어 슬로베니아>등 산문집 출간
2010년
제1회 시와세계 작품상 외 다수의 문학상 수상
2005년
<별 모양의 얼룩>출간 외 다수의 시집 출간
2004년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1년
계간 <포에지>를 통해 등단
1989년
부산대학교 독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