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쭉쭉 늘어나는 창평쌀엿 이야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엿’이라 하면, 시험 잘 보라는 의미를 담아 주고받는 사탕, 시장에서 엿장수가 가위를 치며 파는 간식 정도를 떠올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창평쌀엿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과, 즉 어엿한 전통식품입니다. 약이 없던 옛날에는 위장 기능에 도움을 주기도 했고, 결혼할 때 이바지 음식으로 챙겨가 새 가족들과의 화합을 기원하기도 했죠. 잘 녹는다는 한 가지 단점만 빼면, 백 가지가 다 장점이에요!”
담양 호정식품 판매장에서 만난 유영군 명인은 추석맞이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창평쌀엿 자랑을 엿가락 늘어지듯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다. 창평쌀엿은 영산강 상류의 좋은 쌀에 엿기름을 섞어 천천히 졸여 만든 전통식품으로, 한국의 자연과 정성,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간식이다. 동의보감의 본초강목에는 ‘광주(당시 창평 지역)의 흰 엿은 폐와 장을 윤택하게 해주고 가래를 삭혀주며, 만복하면 쉬었다 먹어도 좋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질이 따뜻해 소화를 도우며 몸이 찬 여성들이 두고두고 먹으면 특히 그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뿐인가? 옥수수가루나 밀가루 대신 쌀을 주재료로 쓰기 때문에 치아에 달라붙지 않고 먹고 나면 입안이 상쾌해지며, 천연 재료와 손만을 사용해 만들어 공해, 폐수를 발생시키지도 않는 환경에 이로운 식품이기도 하다. 창평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쌀엿의 좋은 점만 보고 자란 명인은 과감히 쌀엿의 길로 들어섰고 어느새 엿처럼 희고 곧은 자태뿐 아니라 따뜻한 성질까지 꼭 빼닮은 동반자가 되었다. 유영군 명인과 창평쌀엿의 길고 끈끈한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창평쌀엿의 역사는 세종대왕의 맏형 양녕대군이 전라도 창평 지역에 낙향하여 지내던 때를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해요. 동행했던 궁녀들이 쌀엿의 제조 비법을 지역 아낙들에게 전해주었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죠. 어릴 적 우리 집을 떠올리면 할머니, 어머니가 쌀엿을 빚던 풍경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저는 주변에서 심부름도 하고, 콩가루 항아리에 묻어 둔 엿을 몰래 꺼내 먹기도 하면서 자랐어요. 쌀엿 덕분에 학교도 다니고 직장 생활도 했으니, 지금 쌀엿의 명맥을 이어가는 명인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천명인 것 같아요.”
공무원 생활을 하던 명인은 1988년 본격적으로 쌀엿과 함께하는 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식품제조 허가 획득 및 공장 설비를 준비했다. 일본에도 중국에도 없는, 오직 우리의 것인 이 쌀엿을 세계적 식품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0년 5월 드디어 창평쌀엿이 전통식품으로 지정되자, 그는 호정식품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창평쌀엿 제조에 돌입했다. 일체의 첨가물 없이 고두밥과 맥아만으로 고당도의 식혜를 담그고, 식혜 물을 짜내 하룻밤 내내 달여 적당한 농도의 조청을 만들었다. 그것을 적당한 불에서 주걱으로 휘휘 저어가며 투명한 갈색이도는 좋은 갱엿으로 만들었고, 갱엿을 발효시켜 수증기를 쐬어가며 손으로 잡아 늘이는 과정은 고단하기보다는 즐거웠다고. 그렇게 매일 어깨와 손이 아픈 줄도 모르고 모든 과정에 혼을 쏟아 부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집집마다 엿물 달이는 달큼한 냄새
명인의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아무런 모델도, 선례도 없었기에 직접 이곳저곳 발품을 팔며 연구, 개발, 상품화를 위해 애썼다. 전남대학교,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 의뢰하며 대량 생산의 방식을 모색했고 생산 설비를 마련했다. 대중에게 창평쌀엿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우체국쇼핑을 만나면서부터다. 지역 상품 및 전통 식품의 상품화 자체가 생소하던 당시, 우체국쇼핑과의 만남은 세상 사람들에게 창평쌀엿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체국쇼핑에 처음 실렸을 때, 정말 대단했어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죠. 명절만 되면 도망가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니까요. 근데 이 엿이라는 게 손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두 사람이 죽어라고 엿을 당겨 댔어요. 손이 비뚤어질 정도였죠. 그렇게 밤낮없이 엿을 만들어도 수요가 감당이 안 됐던 기억이 납니다. 우체국쇼핑이 없었다면 지금의 창평쌀엿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 늘 고마움을 가지고 있죠.”
이러한 쌀엿 생산량의 증가는 창평이라는 작은 마을 전체에도 이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유영군 명인은 지역 곳곳 쌀엿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작은 조합을 결성했고, 지금은 엿을 빚는 가구가 50여 농가를 넘어 창평 전체가 엿물 달이는 단내로 가득한 쌀엿 마을이 되었다. 이는 경제적 효과는 물론, 쌀엿 자체를 하나의 지역 문화로서 정착시킨 사례로 유영군 명인의 커다란 자부심이기도 하다.
“전통은 사람의 기억에 의해 전승되는 거예요. 제가 부모님을 보고 자라며 명인의 길로 들어섰듯, 기억을 갖는다는 건 중요하죠. 공동의 기억이 곧 문화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서울, 양주, 대구 등을 돌아다니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반응이요? 인기 만점입니다. 창평쌀엿의 역사나 특징을 간략히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해 직접 갱엿 늘이기를 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요. 두 사람이 함께 엿을 잡고 늘이면 한 번에 잘 되는 게 아니라 바닥으로 처지기도 하고 실도 나오고 난리가 나요.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웃고 떠들며 이야기가 발생하죠. 마지막에 깨, 땅콩, 생강 등을 곁들여 먹으면 그 자체로 달콤한 추억이 됩니다. 쌀엿이 관계를 발생시키는 음식이라는 걸, 저도 최근에 크게 배웠어요.”
엿이 곧 나 자신이라는 믿음
오늘도 희고 달콤한 쌀엿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유영군 명인은 전통과 현재를 연결하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창평쌀엿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물엿 대신 조청을 활용한 한과와 견과류 제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천연 색소를 넣은 대잎엿, 치자엿 등을 개발하며 현대화에도 힘쓴다. 하지만 그의 미덕은 그 중심에 언제나 전통 그대로의 창평쌀엿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거듭 강조한다는 점이다.
“저는 전통식품을 지켜가고 명맥을 잇는 사람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죽어도 내 엿은 엿이오, 엿은 내 한평생이고 곧 나 자신이에요. 제 목숨과도 같으므로 무조건 영리를 추구한다거나 행정의 입맛을 맞추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기구지업(箕裘之業)이라고 하죠. 부모님께 물려받은 업을 지켜, 전통을 살아있는 것으로 지
켜가고 싶어요. 내 입맛이나 이익을 가미해 키우거나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지켜가는 정신으로 한평생 엿과 함께하는 게 저의 꿈입니다. 그러다 보면 세계인이 즐기는 엿이라는 비전 또한 달성할 수 있겠지요.”
‘세계인이 즐기는 엿’은 유영군 명인이 처음 쌀엿의 길로 접어들 때 세웠던 목표다. 이를 위해 그는 창평쌀엿의 옛 맛을 유지하면서 최적의 보관방법, 대량생산 등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연구와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동시에 쌀엿을 곁들인 다과상을 구상하며 담양의 대나무를 테마로 한 대잎차도 개발한 바 있는데, 이미 수출된 대잎차는 유럽 쪽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온도 문제로 인해 한계가 발생하는 쌀엿의 세계화라는 숙제도 이에 힘입어 곧 거짓말처럼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담담한 눈빛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희고 고운 창평쌀엿을 탁하고 깨뜨려 입안에 넣고 씹으면 경쾌하고 부드럽게 부서진다. 그리고 이내 입안에서 밀도 높게 뭉친다. 씹으면 씹을수록 차지고 달콤한 맛은 부드럽지만 강하고 단단한 명인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철학을 지닌 유영군 명인이 있기에 창평쌀엿은 언젠가 남녀노소는 물론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신명 나고 즐거운 간식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엿가락 분지르듯 명쾌하게 말하리라.
창평쌀엿 유영군 명인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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