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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다케조에와 거사의 큰 원칙에 합의하고 다시는 일본공사관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부터 다케조에와의 연락은 홍영식이 맡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홍영식이 찾아가자, 다케조에는 중요한 정보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독일 영사를 찾아갔더니 이상한 말을 했어요. 요즘 조선의 국내 정세를 살펴보면 당파가 갈라져 있어 반드시 한바탕 변이 일 텐데,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상의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기밀이 누설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던데, 아무래도 김 군과 상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다케조에가 지칭한 ‘김 군’이란 김옥균이었다.
“알겠소이다. 김 공과 상의해 보지요.”
집으로 돌아온 홍영식은 즉시 몇 자 적어 김옥균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자 김옥균은 곧바로 홍영식의 집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독일 영사가 했다는 말은 묄렌도르프에게 들은 것이고, 묄렌도르프는 민 씨 일당에게 전해 들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일부 기밀이 누설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모으고, 그 사실을 다케조에에게 알렸다. 그와 동시에 이틀 뒤 동지들을 모아 거사 날짜를 확정 짓기로 했다. 아무튼 다케조에가 제공한 정보는 거사일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고종으로부터 친수밀칙을 받아내다
이튿날 김옥균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입궐했다. 그가 고종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정변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굳이 고종을 만나려 한 것은 고종을 설득하여 개화파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정변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무엇보다 고종의 이해와 협조가 절실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날로 악화되고 있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단독 면담을 신청했던 것인데, 마침 고종이 독대의 시간을 허락했던 것이다.
김옥균이 안내된 곳은 궁궐 내실이어서 주위에 엿듣는 자가 없었다. 물실호기(勿失好機)라,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김옥균은 고종에게 큰절을 올리고 공손한 자세로 말을 꺼냈다.
“지금 천하대세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있고 국내 정세도 날로 위급해지고 있음은 전하께서도 통촉하고 계시는 바이온데, 신이 다시 한번 자세히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김옥균이 간곡한 어조로 말하자 고종은 쾌히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나서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전하, 우선 국제 정세를 살펴보건대, 청국은 청불전쟁의 패배로 국세가 완전히 기울고 있는데, 근일에는 청·일간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양국 군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게다가 노국(露國)이 동방정책을 펼치며 접근하고 있어 그 폐해가 언제 어떻게 미칠지 알기 어렵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서양 제국의 동양에 대한 정책이 크게 변하고 있어 옛날의 방식으로는 안온하게 나라를 지킬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한편 국내 정세를 살펴보면, 당오전의 폐해가 혹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비참하기 그지없으며, 목인덕 같은 외국인을 그릇 고용한 탓으로 빚어진 실책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게다가 간신들이 발호하여 전하의 총명을 흐리게 함과 동시에 청국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김옥균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열변을 토했다. 그때 느닷없이 중전 민비가 침실에서 나오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경의 말을 오랫동안 듣고 있었소. 사세의 절박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민비가 그렇게 물으며 고종 곁으로 다가가 앉자, 고종도 대비책이 뭐냐며 채근했다.
그러자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교섭했던 내용이며 개화파의 계획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다케조에와 신이 처음에는 뜻이 맞지 않아 방해받은 일이 많았음은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바이오나, 이제는 서로가 친근해져 대화가 통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일본 정부의 방침이 전일과는 크게 달라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일본과 청국 사이에 문제가 생길 날도 멀지 않다고 생각되는 바, 차제에 우리 조선 정부도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겠구먼.”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만일 일본과 청국이 교전한다면 그 승패가 어찌 될 것 같소?”
민비가 물었다.
“일본과 청국이 단독으로 교전한다면 승패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오나 일본과 불국이 합세하게 된다면 승산은 필경 일본에 있다 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독립을 꾀할 묘책도 여기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고종이 반기는 표정으로 물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지금 전하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 청국에 빌붙어 종복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일본이 비록 우리 독립을 도와주고자 하여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디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오나, 지금 국가의 위급이 조석에 있사온데 신이 어찌 이 한 몸을 아끼오리까.”
“경의 말은 나를 의심하는 것 같으나, 지금 사세가 국가 존망에 관계되는 것인데 한낱 부녀자의 몸으로 어찌 국가 대계를 그르칠 수 있겠소. 경은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기 바라오.”
민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민비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김옥균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경의 말은 내가 이미 짐작하노니, 무릇 국가 대계와 위급 사항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경의 뜻에 따를 것이니 경은 의심하지 마라.”
김옥균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지 고종이 그렇게 격려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고종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한 김옥균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또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신이 비록 감당하기 어렵사오나, 오늘 밤의 성교(聖敎)가 정녕 귀에 남아 있사온데 어찌 감히 저버리오리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혹시라도 친수밀칙(親手密勅)을 내려 주신다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까 하옵니다.”
그 말을 듣자, 고종은 모처럼 갖게 된 군신 간의 대화에 흡족했던지 김옥균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고종은 친히 붓을 들어 “국가 대계가 위급한 때의 조처는 경의 지모에 일임한다”라고 쓴 뒤 수결을 하고 옥새를 눌렀다.
임금이 친히 쓴 친수밀칙을 받게 되자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김옥균은 감격한 나머지 다시 일어나 큰절을 올리고 나서 고종이 내린 글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감동을 받기는 민비도 마찬가지였다. 김옥균의 화려한 변설에 현혹되었음인지, 민비는 동갑인 김옥균을 바로 보내지 않았다. 술과 안주를 가져와 김옥균을 대접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김옥균이 창덕궁을 빠져나온 것은 먼동이 튼 뒤였다.
고종이 직접 써 준 친수밀칙을 품에 안고 퇴궐하는 김옥균은 천군만마의 지원을 얻은 기분이었다. 나라가 위급한 때의 대처 방안은 자신의 뜻에 맡기겠다는 임금의 약속을 받아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면 거사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사 날짜를 확정하고 안동별궁에 방화하기로 하다
거사일을 나흘 앞두고 거사에 참여할 개화파 사람들이 동대문 밖에 있는 김옥균의 별장에 모였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의 핵심 인물은 물론 실제로 총칼을 들고 친청사대파 요인들을 처치해야 하는 행동대원들도 모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김옥균은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총국 낙성식을 개최하는 날 안동별궁에 방화함을 신호로 행동을 개시한다고 선언했다. 별궁에 화재가 일면 서울을 수비하고 있는 병사들이 모두 달려와 불을 꺼야 하기에 군대 책임자인 4영사가 한자리에 모일 것이며, 방화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친청사대파 두목들을 한꺼번에 처치하기로 했다.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대궐에서 홍영식과 서광범을 찾는다는 전갈이 와 회의가 중단되었다.
방화 대상으로 지정된 궁궐은 지금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던 안동별궁이었다. 이 별궁은 1882년 왕세자 이척(뒷날의 순종)과 세자빈 민씨의 혼례를 위해 지은 결혼식장이었다. 세자빈 민씨는 민비가 친정 일가에서 간택했는데, 바로 민태호의 딸이자 민영익의 여동생이었다. 그처럼 조선 왕가는 3대에 걸쳐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골랐다. 안동별궁은 우정총국으로부터 몇백 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데다 서광범의 집과 바로 붙어 있어 개화파가 거사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튿날 영국영사 애스턴이 김옥균과 함께 박영효, 서광범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김옥균이 회식 장소를 향해 출발하려는데 홍영식이 편지를 보내 왔다. 다케조에가 그날 저녁 개화파 핵심 인사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었다. 김옥균은 애스턴과 저녁식사가 끝나는 대로 가겠으니 홍영식으로 하여금 먼저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회식 장소로 향했다.
김옥균 등은 애스턴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교동에 있는 일본공사관으로 갔다. 휘영청 밝은 달이 서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도착한 홍영식은 공사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 자리는 공사 다케조에 대신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가 차지하고 있고, 그 옆자리에는 통역 아사야마 겐조(淺山顯藏)가 앉아 있었다.
“당초에는 다케조에 공사가 공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큰 원칙은 이미 결정되었고, 결정된 사항에 대하여 재론하는 것은 오히려 무익한 일이라 생각하여, 오늘 밤에는 권도(權道)로 이 같은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오나 그 마음이 금석처럼 굳음을 표시하면서 저로 하여금 대신 공들을 영접케 했습니다.”
시마무라는 다케조에 대신 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자 김옥균이 이해한다고 말하고, 별궁에 방화하는 것을 신호로 거사를 단행하겠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그 날짜가 언젭니까?”
시마무라가 기뻐하며 거사 날짜부터 물었다.
“우선 이달 20일로 정했소.”
김옥균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음력 10월 20일은 양력으로 12월 7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들이 정한 날짜는 그보다 빨랐으나 사전에 누설될까봐 둘러댔던 것이다.
“어찌 그리 늦습니까?”
시마무라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20일 이전은 달이 밝은 것이 흠이오. 오늘처럼 달이 밝으면 들 입(入)자와 사람 인(人)자도 구분할 수 있을 것 아니오.”
김옥균이 재치 있게 둘러댔다. 그 말이 재미있었던지 시마무라는 하하 웃었다.
“아무튼 귀국 우선(郵船) 천세환(千歲丸)이 인천항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단행하려 하오.”
김옥균이 덧붙였다. ‘우선(郵船)’이란 우편물을 실어 나르는 배를 가리켰다. 일본의 우편선 치도세마루(千歲丸)는 10월 20일(양력 7일) 인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치도세마루가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단행하려 하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귀국 정부의 결정이 어떻게 변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오. 만일 조그만 사세의 변동이 있게 될 경우 다케조에 공사가 오늘 결정한 일이 내일 또 어떻게 변할지 염려돼서 하는 말이오. 해서 치도세마루가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하겠다는 것이오.”
그 말을 듣자 시마무라는 다시 하하 웃었다.
일본 정부의 대조선 정책의 변화는 곧잘 치도세마루를 통해 일본공사관에 전달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잦은 정책 변화에 불안을 느낀 개화파 인사들은 우편선 치도세마루가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단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미리 알리지 못한 세부 사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다케조에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만 어가를 강화도로 옮기는 것은 다케조에가 한사코 반대했기에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가 성사된 뒤 잠시 어가를 경우궁으로 옮기는 것은 대궐을 수비함에 있어 불가피한 일이어서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말에서 떨어진 홍영식이 죽음을 암시한 시를 쓰다
김옥균 등은 시마무라와 새벽 2시에 헤어졌다. 그들은 그 길로 이동(泥洞)에 있는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 집에는 이인종, 이규정,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이은종, 윤경순 등 거사에 참여할 장사들이 모여 있었다. 김옥균은 그들에게 오는 17일 오후 8~9시에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맞추어 별궁에 방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비가 내려 불을 지르기 어려우면 18일로 연기하기로 했다. 거사 날짜는 그렇게 10월 17일(양력 12월 4일)로 확정되었다.
이에 앞서 우정총판 홍영식은 전영사, 후영사, 좌영사, 우영사 등 4영사에게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있음을 통보하고 참석 여부를 확인했다. 그처럼 전영사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우영사 민영익은 숙청 대상 1호로 점찍혀 있었다.
이어 각 행동대원들에게 거사 당일 맡을 역할을 정해 주었다. 별궁 방화의 책임은 이인종이 맡되, 그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명, 윤경순, 최은동 4인이 같이 움직이도록 했다. 그리하여 포댓자루 수십 개에 장작을 넣어 서광범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 별궁으로 옮겨 석유를 붓도록 했다. 그리고 별궁 행랑에 화약을 장치하여 폭발시키도록 했다.
별궁에 화재가 발생하면 각 영사가 달려가 불을 끄는 것이 관례이기에 우정총국 연회장에 모인 영사들은 당연히 화재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므로 그곳에서 처치하기로 하고, 영사 1인에 행동대원 2인씩을 붙여 주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일본인 1인씩을 추가로 배정했다. 일본인 역시 조선 옷을 입도록 했다. 그리하여 민영익은 윤경순과 이은종이, 윤태준은 박삼룡과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과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과 임은명이 각각 맡아 처치하기로 했다.대신들의 출입문인 창덕궁 금호문은 신복모가 파수하기로 했다. 신복모는 장사 43인을 소집하여 박영효의 집 근처인 진골에 매복해 두었다 별궁의 방화를 신호로 금호문 밖으로 달려가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이 대궐로 입궐할 때 처치하기로 했다.
전영사 소대장 윤경완은 윤경순의 아우였다. 윤경순은 일찍이 개화파의 행동대원으로 뽑혔으나 윤경완은 그때 비로소 형을 따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는 며칠 동안 꾀병을 앓으며 결번하다 그날 밤 자원하여 궁내 합문의 수비를 맡았다. 그는 전영사 병정 50명을 거느리고 있다 궐내로 들어오는 자들을 막기로 했다.
궁중 내에서 개화파의 거사에 협조하기로 한 인물이 또 있었다. ‘고대수’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 여인이었다. 민비를 모시고 있는 궁녀 고대수가 맡기로 한 역할은 화약을 대통에 넣어 두었다 밖에서 불길이 일면 통명전에 방화하는 것이었다. 42세인 고대수는 남자 5~6명을 당해낼 만큼 힘이 장사였는데, 10여 년 전부터 개화파와 연락하며 기밀 사항을 알려 주곤 했다. 민비의 충실한 궁녀였던 고대수가 어떻게 해서 개화파와 가까워졌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거사에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암호를 ‘천(天)’자로 정하고, 일본 말로는 ‘요로시(ヨロシ)’로 응답하기로 했다. 거사가 밤에 진행되므로 어둠 속에서 동지를 확인하고 적을 구분하려면 암호가 필요했다. 조선시대에는 군대와 순라군 사이에 서로 연락하는 신호로 3자 이내의 군호를 정하여 사용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부평에 있는 신복모가 서울로 올라왔다. 행동대장 이인종이 신복모와 여러 동지들을 거느리고 압구정 근처에 있는 박영효의 별장으로 가서 사냥을 했다. 4영사를 처치하기 위해 차출된 일본인 4명도 동행했다. 거사 동지들끼리 서로 얼굴을 익히고 손발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박영효의 압구정 별장은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데다 경치가 좋고 천렵하기도 좋아 개화파 동지들이 비밀리에 모일 때 곧잘 이용하곤 했다.
그날 밤 그들 개화파 동지들은 사동에 있는 서재창의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서재창은 서재필의 아우로 일본 육군도야마학교 출신인데, 우정총국이 개국할 때 사사로 발탁되었다.
그날 개화파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서재창의 집에서 술을 마신 개화파 동지들은 김옥균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거사 절차를 논의하기로 했다. 술에 취한 홍영식이 말을 타고 이동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 팔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김옥균의 집에 도착하자 홍영식은 지필묵을 찾더니 단숨에 한시 한 수를 썼다.
我落之時地治我血
我死之時天鑑我心
惟我同心同我誓心
若背此心蒼天必誅
내가 땅에 넘어질 때 땅이 내 피를 다스렸네.
내가 죽을 때 하늘이 내 마음 살피리라.
나와 같은 마음 가졌거든 나와 함께 맹세할지어다.
만약 이 마음 배반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벌하리라.
홍영식은 그처럼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시를 일필휘지로 내리썼다. 그 시를 읽는 동지들의 표정이 곱지 않았다. 박영효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김옥균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