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정엄마의 첫 기일이라 시골에 다녀왔다. 어느새, 시골은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잊은 채 산과 들에는 봄나물이 지천이었다. 친정엄마는 살아생전 매년 봄에 직접 뜯으신 쑥이며 달래, 냉이, 두릅 등을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에게 택배로 보내주는 낙으로 사셨고, 5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그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봄나물을 팔러 다니시곤 했다. 해마다 봄나물을 보내주시다 보니 귀한 줄 몰랐는데, 이젠 곁에 안 계시다보니 자연스레 소쿠리와 칼을 들고 밭으로 향했다. 쑥을 뜯는 동안 일찍 청상과부가 되어서 많은 자식들 키우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팔순이 넘도록 일만 하신 엄마 생각이 간절하기만 했고, 돌아가시기 전 밝은 목소리로 “언제 시골 한번 안 다녀가냐? 하기사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오겠냐. 나중에 여름휴가 때나 한번 다녀가거라” 하시던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될 줄 알았다면, 조만간 내려가겠다고 말이라도 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과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이래서 옛 어른들이 살아생전 잘 해야 한다고 했던가 싶다.엄마는 봄만 되면 유난히 좋아하시던 쑥버무리를 만들어서 제사상에 올렸다. 가난한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그 손맛과 정성에는 못 미치지만 얼추 맛은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몇 해 전까지 이렇게 손수 만든 떡을 드시던 분이 엄마인데, 이젠 제사상에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하늘에서도 엄마가 좋아하셨으리라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친정집은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데, 막내딸을 버선발로 나와 반겨줄 엄마는 안 계시니, 못내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엄마와의 짧은 만남을 하고, 또 다시 기약 없는 고향집의 대문을 나왔다.
한 소쿠리 가득 뜯어온 쑥과 나물을 앞집과 아래층에 나누어 드리자 어디서 이 귀한 것을 뜯었냐며 아껴 먹어야겠다고 좋아하신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 엄마도 그동안 자식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허리가 굽고 다리가 아픈데도 봄마다 온 동네 산과 밭을 다니며 나물과 고사리를 캐지 않았나 싶다.
요즘, 우리 집은 끼니마다 봄나물로 밥상이 가득하다. 아침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쑥국을 끓이고, 저녁에는 상큼한 돌나물과 달래를 무쳐서 삼겹살에 싸 먹기도 하고 비빔밥을 해 먹기도 한다. 아마도 이 나물이 없어질 때쯤 나는 또다시 올 수 없는 친정엄마의 택배를 기다릴 지도 모르겠다. 비록 받지 못하는 택배일지라도 나는 하염없이 손꼽아 기다리며, 엄마를 회상하고 싶다.
엄마!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하지 못한 말 “우리 엄마라서 고마웠어요. 편히 쉬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