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님, 주재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사내가 목포우체국 군산출장소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직원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보고했다.
'누구였소?'
'주재소장이셨습니다.”
'용건은?'
두 사람의 모습은 흡사 군인 같았다. 그런데 직원의 인상도 소장이라는 사내와 비슷하게 부드럽고 착해 보였다.
소장 하야가와는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곧 주재소장과 통화가 되었다.
'아, 소장님. 무슨 색다른 정보가 없나 해서요. 궁금해서 전화 걸었었지요.'
주재소장의 탄력있는 목소리였다.
“예, 제 쪽에서는 별일 없습니다.'
하야가와의 나직한, 그러나 긴장된 대꾸였다.
내가 혹시 놓친 정보가 있는 것인가.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인가. 하야가와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소장님이 암암리에 임무 수행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 잘 압니다. 그런데 앞으로 더욱 치밀하게 정보 수집을 해주기 바랍니다.”
'아, 예, 예...”
상대방의의중이 아직 간파되지 않아 하야가와는 형식적인 대답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 성급한 질문이나 어설픈 대꾸는 자기 결함을 노출시키거나 자기 값을 떨어뜨리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에에, 또, 지금 시점에서 명확하게 말 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금명간 상황의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일층 정보망을 강화하고, 활동을 민활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아, 예, 그렇습니까.”
앞의 글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제1부 '아, 한반도'의 한 구절이다. “........ 금명간 상황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1904년 8월 22일에 체결된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을 말하므로 이 글은 1904년 8월 중순에 전개 되는 상황을 묘사하였음이 분명하다.
「아리랑」에는 군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도 30년 전에 군산에 있는 방송회사 사장으로 2년 가량 근무한 적이 있어 이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었을 때 흥미롭게 읽었다. 뿐만 아니라 앞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인 우체국 출장소장이 등장하여 더욱 관심을 갖고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는 특히 이 대목에서 일본인 우체국 출장소장의 정보원 활동을 부각시키려고 한 듯한데, 이는 추정이 가능 한 일이다. 나도 우편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라, 일본이 한국의 요지에 우체 국을 불법적으로 개설하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음에 있어 파견된 우체국원이 스파이적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갖가지 문헌을 조사하여 그 기록을 찾은 일도 있다.
즉, 1905년 한국의 통신기관을 강탈한 일본 우체 당국은 지방에 파견되는 모든 요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 그 지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항은 그 일이 정치적인 사항이나 경제적인 사항, 기타 여하한 사항임을 불문하고 각자의 이목에 접촉되고 각자의 관찰권내에 들어온 사항은 일점 일획의 미세한 사항이라 할지라도 이를 운연일말(雲煙一抹)에 붙이지 말고 일견일문(一見 一聞) 빠뜨리지 말고 놓치지 말고 모두를 중앙부에 보고하라.” (직역)
극비 문서인 「한국 통신사무 인계지침서: 韓國通信事 務引繼心得」에 기술되어 있다.
그밖의 작가가 기술한 내용에 관하여는 이 작품이 창작인 만큼 반드시 사실이어 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통신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독자를 위하여 당시의 실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 인용한 대목은 1904년 8월말에 전개된 장면이라는 전제 아래 소설 아닌 현실과 대비하겠다.
첫째, 우체국원의 정보 수집활동은 사실일 것이다.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둘째, 목포우체국 군산출장소가 아닌 군산우체국이다.
군산에는 1899년 11월 11일 일본 목포우체국 출장소를 불법적으로 개설하였고, 1901년 3월 1일 군산우체국으로 승격 독립시켰다. 따라서 목포우체국 군산출장소가 아닌 군산우체국이 정당하다.
셋째, 당시 군산에는 전화 시설이 없었다.
군산에 전화가 처음 개통된 시기는 1906년 5월 15일로 우체국간에만 통화가 가능하였고, 가입자 전화는 1907년 4월 1일에 비로소 개통된다.
넷째, 주재소는 없었다.
당시 군산에는 일본국 영사관이 있었을 뿐 경찰서나 주재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경찰권은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국에 의하여 강제 조인된 조약,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일본측에 이양된다.
다섯째, 이 소설은 앞의 글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조선인의 일본 우체국 이용 상태를 운운하면서 조선인은 일본인의 1할 가량을 이용한다.고 하였는데,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설치된 한국 정부가 경영하는 우체사가 있어 겨우 각 항구만을 연결하는 일
본 우체국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고, 우편요금도 우리의 2배에 가까운 일본 우편의 이용을 반국가적 이적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일본 우편 이용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이렇게 따지면 「아리랑」은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주재 소장과 우체국 출장소장간에 개설되지 않은 전화 통화를 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아리랑」은 창작 소설이므로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없다.
다만 통신사(通信史)적 측면에서 살펴봤을 뿐임을 분명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