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하는 산악회의 차편을 빌려 영남 알프스의 종주 산행을 계획하고, 며칠 전부터 나름대로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올 여섯개나 거느린 산군을 하루에 종주한다는 것이 조금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10여년 이상의 산행 경력에서 얻어진 근력을 바탕으로 한 워킹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산악회에 전화를 걸어 자세한 내용과 함께 예약을 마치고 나니, 안내양의 무박산행이라는 말이 약간은 부담이 되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리치등반보다는 종주등반을 즐겨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번의 종주등반은 더더욱 놓칠 수가 없었다.
떠나는 날짜는 5월 6일(토요일) 21시. 코스는 통도사 입구에서 시작해 영취산(1,092m) • 신불산(1,208m) • 간월산(1,083m) • 능동산(982m) • 천왕산(1,189m) • 재약산(1,108m) • 사자평원과 고사리분교를 지나 표충사까지로 되어 있었다. 지도를 펴놓고 시간을 체크해 보니, 열 시간을 넘게 걸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코스였다.
드디어 떠나는 날이 돌아왔다. 일과를 마치고 부랴부랴 집으로 내달아 배낭에다 필요한 음식과 장비를 쟁기는 마음이 조급함과 초조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벌써부터 몸과 마음은 영남 알프스의 천황산 정상에 올라 있는 기분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필요를 느껴 소주잔으로 목 뒤로 젖히기 운동을 세 번을 시켜봤다. 한번은 너무 작고, 두번으로 짝을 채우면 재수가 없다던가 …….
알콜의 저력이 살며시 전신으로 퍼지면서 약간 진정은 되었지만, 등산화 끈을 졸라매는 손 끝이 사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음을 느꼈다. 여행은 항상 설레임으로 시작하여 모험으로 진행되고, 노곤한 몸과 추억을 담은 사진을 남기며 끝이 난다고 했던 시구가 생각난다. 당일 산행 때보다는 배낭의 부피가 너무 크고 무거웠지만, 짊어지고 나니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우리나라 속담에 처음 시작이 좋으면 끝맺음도 좋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이번 산행이 순조로울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능동산 정상에 선 필자
떠나는 버스에 올라서니, 그 동안 산행에서 만났던 안면있는 얼굴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어 낯설지 않았다. 21시를 조금 지나 버스가 출발해서 다음날 새벽 4시경에 경상남도 양산군에위치한 통도사 입구에서 차가 멎었다.
배낭을 해체해서 산행에 꼭 필요한 물건만을 골라 배낭에 집어넣고, 곧바로 산행에 들어갔다. 헤드랜턴의 차가운 불빛 이 어둠을 갈랐고, 무엇이 그리바쁜지 선두 다툼이 심해지면서 진행 속도가 빨랐다.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의 속도로는 무리일 것 같아 후미 그룹으로 밀려나 아침식사 장소인 백운암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짐을 풀어 집사람이 정성스레 준비해준 도시락을 먹는데, 새삼스레 집사람의 고마움이 밥알과 함께 씹히면서 갑자기 콧날이 찡해옴은 왜일까. 30여년을 하루같이 궂은 일 마다 않고 식구들 뒷바라지에 젊음과 청춘을 넘겨, 이제는 한 아이의 할머니라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아내에게 정말 잘해줘야겠구나 하고 다짐도 해보았다. 또한 최첨단의 유행은 못 될 망정 그 사람이 입어서 어울리는 옷 한 벌 정도를 새로이 장만해서 단 둘만의 여행도 한번쯤은 가져봐야겠다는 생각도 마음 속 깊숙히 묻어 놓았다.
본격적인 능선 산행이 시작되는 영취산 정상에 선 시간이 7시 30분, 다행히도 안개가 덮이지 않아 시야가 좋았다. 동남쪽 밑으로는 통도사가 하나의 작은 점처럼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머금은 푸른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고, 서북쪽에는 천황산 정상이 동양화 한 폭을 펼쳐 놓은듯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 웅지를 뽐내고 있었다.
신불산으로 가는 능선길은 부드러웠으나,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의 푸르름이 자꾸만 눈길을 빼앗아 전진 속도가 더뎠지만, 조바심은 없었다. 신불산 정상에서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기념촬영을 하고, 간월산으로 향하는 캐러밴이 시작됐다. 아직은 여력이 있어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나무가 별로 없는 능선 산행에 오월의 태양이 잘게 뿌려지면서 살찾이 벌겁게 탈 정도로 날씨가 무척 더웠다. 더불어 진행 속도가 떨어지면서 계획에 다소의 차질이 생겨 간월 산에서는 휴식도 생략하고 배내 고개를 향해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배내고개에서부터는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 쪽은 목장으로 가는 차도를 이용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등산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나는 등산로를 이용키로 하고 배내고개를 떠나 능동산 정상을 향해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경사는 완만했지만 하산했다가 다시 오르는 산행이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이제부터는 정신력과 지구력으로 극복해야만 된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부터는 보폭이 좁아지고, 가볍게 해서 짊어진 배낭이 그 무게를 더해 온몸을 짓눌러 왔다.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목적지인 표충사까지는 약속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데, 무릎은 시큰거리고 몸의 중심은 잡히질 않았다. 리듬이 깨진데다가 아마도 체력의 소모가 심한 탓이리라. 어렸을 적 힘까지 보태 가까스로 능동산 정상에 올라서니 천황산 정상이 가물거린다. 천황산까지의 거리를 많이 좁혔는데도, 거리 감각이 무디어져서인지 더 멀리 보이는 것만 같았다.
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서니 목장으로 통하는 차도와 만났다. 천황산 동쪽에서 시작되는 등산로까지는 어쩔 수 없이 차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쯤 걸었을까, 천황산으로 들어가는 등산로에 표시판이 붙어 있어 그곳으로 올라서니 여기저기에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전날 밤의 야영팀이 버리고 간 것들이 틀림없으리라.
눈을 들어 천황산 정상을 바라보니, 많은 등산인들이 무리지어 무어라 소리치는 모양인데, 거리가 멀어서인지 들리질 않았다. 지금쯤은 나도 저곳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면서 , 그곳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천황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만 한다. 경사는 완만했지만, 또 한번 체력과 싸움을 벌여야 될 것 같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무아지경에서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대 여섯명의 아가씨들이 모여앉아 여유있는 쉼을 즐기고 있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처럼 쉬고 싶은 충동이 일렁였다.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발자국 도장을 찍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길이 먼 옛날의 추억인 양 아득 하기만 하다.
드디어 천황산 정상! 수십만 평의 사자평원 억새밭이 푸르다 못해 진한 녹색 물감으로 페인팅해 놓은 것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마치 녹색의 천국에 두동실 떠 있는 기분이다, 정상에 쌓인 돌무덤들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재약산을 향해 배낭의 허리끈을 힘껏 졸라맸다.
정상에 올라서니 영남 알프스의 전경이 스카이 라인을 이루면서 한눈에 잡혀왔다. 거대한 몸 속에 아름다운 비경을 숨겨 둔 채 인간의 자취를 거부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그렇게 서 있으리라.
내려오기 싫었지만 하산을 서둘러 고사리분교 옆 주막집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 40분. 먼저 도착한 몇몇 친구들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오늘의 총 산행시간을 계산해 알려 주었다. 10시간 40분이라나. 아직도 1시간 거리인 표충사까지가 남아 있었지만, 평지나 다름없는 하산길이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목이 말라 주막집에서 내놓은 막걸리를 바가지가 넘치도록 퍼 단숨에 들여마셨다. 꿀꺽꿀꺽 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컸던지, 옆에 있던 친구 하나가 “마른 논에 물대는 거야?”하며 농담을 거는 바람에 한바탕 앙천대소를 했다. 한 잔더! 이번에는 대접으로 마셨다. 도토리묵 특유의 텁텁한 맛이 입맛을 돋구는 촉매 역할까지 해주니 그 맛은 정말 일품이다. 술기운이 전신에 퍼지면서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엄습한다.
표충사로 향하는 하산길은 농담과 가락들이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게 쉽게 내려왔다. 대종주를 마감하면서 건 한숨을 토해냈다.
알프스여, 천황산이여, 올 겨울산행에는 눈 덮인 그대 모습을 보기 위해 다시 한번 찾으리라. 그날만은 그대의 넓은 품에 안겨 달콤한 이야기도 나누고, 포근한 잠도 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