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글밭
글. 유수경(서울시 송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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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식 있는 자리에 갈 일이 생겼는데 입을 옷이 없었다. 사실, 옷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옷들이 별로 마땅치 않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옷장을 한번 뒤져봤다. 그리고 발견했다. 얌전해 보이는 원피스 한 벌이 옷장 맨 끝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헤아려보니 20년 전에 산 옷이다. 정확히는 내가 산 게 아니고 친정 엄마가 사준 옷이었다.
20년 전, 그때는 유난히도 사는 게 어려웠다.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친지 결혼식이 다가왔다. 결혼식에 가기 위해 시골에 계시던 엄마가 며칠 앞서 우리 집으로 오셨다. 결혼식 전날, 엄마는 갑자기 시장에 가자 하셨다. 아마도 엄마는 내가 옷장을 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걸 본 모양이었다.
엄마는 근처 옷집으로 날 끌고 들어갔다. 엄마는 내게 옷을 골라보라고 했다. 나는 시큰둥했다. 엄마에게 옷을 얻어 입는다는 것도 그랬고, 시장 표 옷을 얕잡아본 마음도 없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심플하고 얌전한 원피스를 골라주었다.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옷은 싫어하는지라 주인 아주머니의 선택이 나쁘진 않았다.
그때 산 이 원피스는 제법 요긴하게 쓰였다. 입다보니 편하기도 하고 색깔이나 디자인도 얌전해서 여러 번 입었다. 그러다가 직장에 다니면서 원피스 입을 일이 줄어들다 보니, 옷장 깊숙이 넣어둔 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몸무게는 그대로여서 몸에도 맞았다. 원래 옷을 잘 버리는 편인데, 용케도 이 원피스는 간수하고 있었다니. 이렇게 다시 꺼내게 되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덕분에 고민을 덜었다.나는 그 후로도 원피스를 다시 옷장에 걸어두었다. 몸무게가 변하지 않는 한, 아마 앞으로도 입을 일이 있을 것 같다. 산다는 건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수지맞은 기분이 드는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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