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자동화사업(4)
시범사업의 결과 분석
농어촌용 전자교환기의 시 범사업에서 노출된 문제를 몇 개 짚어 보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이 분석 결과는 그 후 광역 자동화사업을 실행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이다. 그 하나는 원당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는데, 가입자들이 전화를 반납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4,000회선이란 당시의 농어촌 지역으로서는 제법 대용량이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적체를 해소하고 더하여 누구든지 가입 희망자에게는 모두 가설을 해주었던 것이다. 장기 적체됐던 지역이었으므로 청약 접수 초기에는 너도나도 가입 신청을 하여 승낙을 했고, DMO 교환 시스템 개통과 동시에 가설을 해주었던 것이다. 당시는 도시나 농어촌 할 것 없이 전화 놓기가 어려웠던 때라 그야말로 빚을 내서라도 전화를 달던 시대였다.
그런데 개통 후 몇 개월이 되었을까 하는 때에 해약 가입자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연간 100만회선을 공급하겠다고 장담한 계획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원인을 심층 분석하도록 하였다. 원당은 당시 내가 경작하던 벽제농장에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나도 걱정이 되어 가끔 현장을 가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현장 환경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아직 기억에도 남아 있다.
그 첫째 요인은 한 마디로 말해 전화의 통화 요금이 비싸다는 것이었다. 금액상으로 보면 과거 자석식 교환대 시절에는 월 1,000원이면 시내전화는 얼마를 걸든간에 추가 요금이 없었다. 또 시외전화는 교환원이 교환해 주어야만 가능했는데, 그나마도 잘 걸리지가 않아서 시외전화료 부담도 미미했었다. 그런데 전자교환기가 되고 나서 사정이 급격히 달라졌던 것이다.
자동교환 방식으로 전환되면, 요금 규정에의 하여 기본료만 월 3,000원을 무조건 내야 한다. 거기에 플러스 통화 도수에 따른 도수료를 부담 해야 했다. 이에 더하여 안걸리던 시외전화도 척척 걸리게 되니, 아무래도 시외전화도 안쓸 수 없어 시외전화요금도 적지 않게 부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이 서울 근교이다 보니 서울과의 시외전화 수요가 비교적 많았다. 그래서 이럭저럭 하다 보면 월 1만원은 거의 기본이고,조금 사용했다 하면 2만원 이상이 된다는 것이었다고 기억된다. 월 1,000원의 전화로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전화가 첨단 기술이니 전자 교환기니 하면서 일약 10배 이상의 부담으로 뛰고 보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비스의 내용으로 보면 가격만큼의 가치는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화 사업자 입장에서는, 교환 방식만 수동에서 자동으로 변경한 것이지, 전자교환기라고 해서 요금을 인상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품질과 서비스를 향상시켜 준 것에 불과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여러 면 단위 시내전화를 통합시켜 부분적 광역화를 시행했으므로, 오히려 시외요금이 해당 면 상호간에는 시내요금으로 대폭 인하된 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객으로부터 오히려 환영을 받으려니 기대했었는데 등을 돌리다니, 참으로 난감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객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많아진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화 걸 때마다 요금이 올라가니 과거 모양으로 선심 삼아 전화를 아무에게나 사용할 수 있게 하던 인심도 문제가 되고 말았다. 상대방이 알아서 요금을 지불해 주면 좋지만 그렇지도 않으면 속이 불편하고, 막상 이웃 친지가 돈을 내겠다고 해도 받기가 껄끄럽고 이래저래 인심만 사납게 됐다. 시범 지역이 둘 다 서울 근교로 동등 조건이라고 예상 했었는데, 구리 지역에서는 고객의 반응이 좋았고, 반납 사건도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시외요금이었다. 가입자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들이 툭하면 시외통화를 하게 되고, 월말에는 고액의 전화요금으로 고민을 하게 됐던 것이다. 더욱더 친지나 과객에게 전화를 사용하게 했을 때 시외요금은 얼마인지 알 수도 없어 사용료를 받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더욱 화를 나게 하는 것은 몰래 혹은 속이고 고액의 장거리전화를 거는 문제였다. 과거 같으면 전화를 건 사실이 없다고 전화국에 항의도 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컴퓨터가 기록한 요금명세서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당시 나는 몇 가지 새로운 서비스의 채택을 제안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가입자 희망에 따라 시내전화전용 서비스 제도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시외전화의 자동호출 즉, DDD(Direct Distance Dialing) 통화를 억제하는 서비스를 가입자 희망에 따라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이 기능은 전자 교환기에 기본적으로 구비되어 있었고,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가입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기본 서비스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가입자는 시외 요금 걱정을 안하니까 마음 놓고 전화를 쓸 수 있고, 또 남에게 빌려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입자가 시외전화를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외전화의 수신은 요금 부담이 없기 때문에 자동으로 착신하는데 하등 문제가 없고, 발신은 교환원에 의한 수동즉시 시외통화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무 부서인 전무국(당시의 영업 담당)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세입이 가장 중요한 때에 세입 감소를 초래할 수 있는 서비스를신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DDD에 의해 시외교환원의 수요를 억제해야 하는데, 이에 역행하는 서비스이므로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객이 왕이라는 지금 환경에서 보면 독점 사업자의 오만한 태도라고 여길 수 있으나, 당시의 실정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두번째 서비스는 요금통보 서비스였다. 이 서비스는 시외통화를 완료한 즉시 가입자에게 요금을 통보해 주는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는 최근에 와서야 한국통신이 서비스를 개시했지만, 전자교환기에는 부가 서비스로서 그 당시부터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 서비스를 경험했었는데, 참 편리한 서비스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거리의 공중전화기 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공중전화기를 설치하기 곤란한 중소도시 이하 농어촌 지역에는 매우 필요한 서비스로 여기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 서비스 제안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거절됐다. 과잉 친절이며 역시 교환원의 추가 수요를 유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객이 필요한 서비스를 외면한 횡포는 고객이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값비싼 관행을 창출하게 만들고 말았다. 즉, 전화기 다이얼에 자물쇠를 채우는 방법이 그 하나이고, 또 한 가지는 교묘한 전자장치에 의해 시외 호출( '0'으로 시작되는 呼)을 자동으로 억제하는 장치였다. 이 기술은 시내공중전화기에서 사용하던 기술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풍속이지만 오만한 사업자에 대항할 수 있는 고객의 부득이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시내전화도 경쟁체제로 되었으니, 아마도 고객의 의사가 보다 존중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러나 속담에 한 번 맛본 관료주의는 쉽사리 불식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농어민의 생산성과 편익 증대
또 하나의 문제는 별정우체국내에 전화시설을 설치하는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상했던 우려사항이었는데 실제로 당면하게 됐던 것이다. 이것은 구리 지역에서 발생했었다. 덕소에 별정우체국이 있었는데 우체국장이 원격교환장치의 설치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 지역은 제법 인구가 많아서 1,000여 가입자가 됐던 것으로, 시험상으로도 복수의 원격교환장치를 시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업자 측면에서 매력이 있는 만큼 별정우체국장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중대사였던 것이다. 설치공사를 담당했던 현업 부서에서 도저히 공사를 예정대로 시행할 수 없고, 해결 방안도 없다는 것이었다. 설득 공작을 한답시고 나도 방문을 해서 별정우체국장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가보니 신앙촌이 주위에 신설돼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경제적으로도 활기찬 지역이었다. 수지 맞는 전화 영업권을 포기해야 하는 별정우체국장의 심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내가 양보해야 했지만,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내가 굴복하면 전국 광역화사업은 큰 차질을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타협안으로 해결이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시공에 상당 기간 지체는 됐었지만 일단 해결은 됐다. 아마도 비교적 고액의 설치장소 임대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낙착됐던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된다. 한편으로는 별정우체국장도 더 버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먼저 개통된 가입자들의 환호 상황을 보고 들은 덕소 관내 가입자들의 불만과 항의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시험 결과에 대해 구리 지역에서는 환영 일색이었는데, 왜 원당 지역에서는 환영은 고사하고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심지어는 반납 사태로까지 발전됐느냐에서 문제점을 찾아봐야 했다. 원당에 설치됐던 디지털 교환기 DMO는 고장이 잦아 통화 중단이 전면적 혹은 원격교환장치 단위로 발생하여 고객들의 불만과 불신을 사게 한 점을 들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지역적 환경의 차이였는데, 모국 교환기를 설치한 도시의 여건 차이였다. 구리 지역이라고 했지만실제는 구리가 아니고 남양주군 소재지였는데, 명실공히 그 지역의 통화량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모국과 자국간의 통화량이 많았고 따라서 광역자동화의 혜택, 즉, 면 단위 통화가 시외에서 시내요금으로 바뀌었으며, 원활한 시내 및 시외전화의 자동화 서비스는 주민들의 생활 편익을 만족할 만큼 향상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물론 전자교환기의 고장도 거의 없었다. 또한 그 지역에는 당시도 이미 서울권 주택사업이 제법 진척돼서 실질적인 서울 시민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서울과의 원활한 전화 소통 욕구가 요금보다 우선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원당 지역은 이와는 사정이 달랐다. 물론 원당도 틀림없는 군 소재지였지만, 상업면에 서나 전화 통화량면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청이 서울에서 이리로 이전된 지도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일산이라는 오래되고 비교적 큰 도시가 상업과 전화면에서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산에는 기계식 자동전화국이 있었고, 기계식이었으므로 원당 전자교환기와 광역자동화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입자의 통화는 원당보다는 일산이 많았는데, 종전과 같이 시외요금을 내야 했던 것이다. 원당의 DMO 교환기가 여러 면 단위를 광역화는 했지만 모국인 원당과의 통화는 행정용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고, 면 상호간 통화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광역자동화의 혜택을 별로 느낄 수 없는 지역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농업지대로 비농가가 많은 구리 지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광역화의 혜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내 및 시외전화로 인한 요금 부담이 늘어난 부분만이 돋보이게됐던 것이다. 거기에다 구리와는 달리, 당시원당 지역에는 실질적인 서울 시민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 시외통화에 대한 매력도 비교적 크지 못했었다.
그러나 약 2년 후 반납 현상은 전화 적체 쪽으로 역전됐다. 그 당시의 분석 결과는 두 가지로 집약됐던 것으로 기억난다. 한 마디로 말해, 전화의 효용 가치가 향상됐음을 뒤늦게 인식하게 됐던 것이다. 그쯤에는 일산도 광역화에 포함 됐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그 하나는 비싸다고 생각했던 요금이 생활 편익 향상을 감안할 때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실감하게 됐던 것이다. 또 하나는 충동 구매 현상이었다. 이웃집에 전화가 있는데 자기가 없으니, 상대적 빈곤을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와는 달리 농촌은 집 상호 간 거리가 멀어서 야간이나 악천후 때에 왕래가 곤란하며, 공중전화의 이용도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와는 반대로 이웃과의 통화가 비교적 필요했던 것이다. 이웃집에도 전화가 없을 때는 번거롭지만 방문해서 대화를 해야 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전화를 갖고 있으니 자기도 갖지 않으면, 우선 본인도 불편하지만 남에게도 번거로움을 강요하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아마도 서울에 사는 자제 혹은 친척들의 전화 가입 권유도 큰 힘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쯤 되어서, 결과적으로 광역자동화사업은 농어민의 생산성과 편익 증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고, 절찬리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자신을 갖게끔 되었다.
근면 성실했던 노던텔레콤사
기술적 측면에서의 성과도 확인할 수 있었다. 母子局 구조의 디지털 교환 시스템이 역시 우리 농어촌에 적합한 시설이란 점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보통 10km가 초과되는 면 단위 자국을 군 소재지에 있는 모국에 연결함에 있어 디지털 다중화장치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장치는 여러가지 기술적 특성으로 인하여 통화 품질을 현격하게 향상시켰으므로, 악을 써야만 가까스로 통화가 가능하다는 농어촌 전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혁신시켰다. 그 당시 여건으로는 대도시의 대부분 전화보다도 품질이 더 좋았다. 둘째는 집선 기능이 선로집선장치보다 우수하여, 그렇 게도 오랫동안 난제로 됐던 국간 중계선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원거리 구간에서 전송로의 수요를 감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체적 비용 절감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건설상의 애로를 감안하면 중요성이 더욱 부가 된다. 한 마디로 말해, 열악한 농어촌 지역의 상황에 최적인 전송로 시스템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로 건설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함축한 의미에서, 미국 사람들은 선로집선장치나 원격교환 장치 등을 線路利得장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實線을 얼마만큼 불려서 활용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더 크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선로이득이란 실제로 사용하는 회선 수와 실선 수와의 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원거리 구간에 실선이 4회선인데, 이것을 다중화 또는 집선기술을 이용하여 128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게 했을 때 선로이득은 32(배)가 되는 것이다.
기술적 불비 혹은 희망사항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하나가 원격교환장치의 교환 능력 부족에 있었다. 모자국 전화망 시스템의 가장 이상형은 모자간이란 상호 의존형이 아닌 독립형으로서, 완전한 독립된 교환기들이 여러 지역에 분산 설치되어 상호간을 고신뢰도의 중계선으로 연결함으로써, 총합적으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 면 단위에 설치되는 원격교환장치가 완전 독립적인 교환 기능을 보유해야만 모국 교환기의 고장이나 혹은 국간 중계선의 절단 등 불의의 장애가 발생했을 때, 그 면 단위 지역만은 시내통화가 완전히 정상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범용 원격교환장치는 극도로 제한된 가입자, 예를 들면 112 · 119 · 114 등과 같은 비상용 전화에 한해서만 교환 기능이 부여되고 있었다. 이것은 선로집선장치보다 이 부분만큼만 좋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금을 산정하는 과금장치는 모국 교환기에만 장치되어 있으므로, 시내요금을 징수하지 못하더라도 이와 같은 비상 상태에서는 원격교환장치에 속해 있는 모든 가입자간 시내통화는 가능해야 했는 데, 그 당시의 기술로서는 아직 불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환 기능을 局地交換 기능이라고 한다. 국지교환 기능이 미미했으므로 그 당시의 원격교환장치는 실질적으로는 선로집선장치 역할이 주된 기능이었다. 그러나 선로집선장치와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이점은, 아날로그 · 디지털의 변환 과정이 생략됨으로써 시스템의 신뢰성 향상과 비용 절감의 효과가 크다는 점이다.
두번째 문제는 역시 비상시에도 과금이 되어 야 하는 희망사항이었다. 이 시범사업을 통해, 어떤 형태로도 과금될 수 있는 데이타의 일시 저장 기능이 추가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지교환 기능의 부족과 과금 기능의 미비는 시 범 시스템들의 타고난 특성이었고 계약사항이 었으므로 불합격의 요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 본격적인 농어촌용 디지털 교환기 시스템에는 이들 기능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시범사업이 지니고 있던 또 다른 측면을 소개함으로써 당시 우리가 당면하고 있던 전화의 수준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미국 농촌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1,500여 독립전화회사들의 기계식 자동 교환기의 전자화계획이 농무성의 자금 지원하에 실행에 옮겨지는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가 시험했던 스트롬버그 칼슨 회사(SC사)제 DMO 및 노던텔레컴 회사 (Nt사)제 DMS-10 등은 모두 미국에서도 상용 시험 단계에 참여했던 시설이었다. 다시 말해, SC사와 Nt사는 같은 시기에 그들의 초기 제품을 미국과 우리 나라에서 상용시험을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당시 나나 현장 감독자도 그와 같은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회사에서 파견나온 직원들의 행동에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장감독을 맡았던 직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구리 지역을 담당했던 Nt사 직원들은 근면 성실하고 기술도 좋아서, 문제가 생겨도 척척 해결하는 그야 말로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당을 담당했던 SC사 직원들은 한 마디로 말해, 불성실하다는 것이었다. 근무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돌아가서 다른 직원이 미국에서 와야만 해결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국식 스타일이므로 비교 대상이 없었더라면 현업 직원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교 대상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나태하게 보였던 것이다. 특히 DMO 교환기는 고장도 잦다 보니 현장 직원들의 눈에는 시설보다는 작업원의 불성실함이 두드러지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 후 Nt사와는 PCM장치의 대량 계약으로 친하게 됐고, 그 회사의 성장 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다. SC사는 미국 회사로서, 미국 농촌에 ST식 자동교환기를 거의 독점 공급했던 회사였는데, 따라서 전자화계획에도 당연히 참가한 회사였다. 이에 반해 Nt사는 캐나다의 비교적 신생 회사로서, 미국 농촌의 전자화계획에 처음으로 경쟁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즉, Nt 사는 외국의 도전자였으니 적극성과 성실성을 무기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년 후 내가 Nt 본사를 방문하고 DMS-10 생산공장을 시찰했을 때 깜짝 놀랐었다. Nt사는 DMS-10으로 대성공을 해서 사세가 배 이상 커졌으며, 특히 DMS-10은 90%를 미국에 공급하고 있어 캐나다에는 본사만 있을 뿐이고, 실제 주된 영업과 생산은 미국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Nt사는 이름도 Notel로 바꾸었지만 교환기 분야에서는 세계의 정상을 다투는 회사로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하기까지에는 MCI를 비롯한 미국의 대형 통신회사들이 장비시장을 석권한 덕택도 있었다. 잘 자랄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속담을 실감케 하는 일이 시범사업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범사업은 또 다른 의의가 있었고 감회도 깊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