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매듭장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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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무형문화재 제22호 정봉수 매듭장
돌쟁이의 저고리 앞섶을 여며준 작은 단추, 선비의 위엄을 상징하던 도포 끈과 관복의 후수, 부채의 선추, 그림이나 글씨를 매달았던 벽걸이, 꽃가마와 상여, 영정 그 어디에도 매듭은 빠지지 않았었다. 생활문화가 서구화되면서 매듭은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고 실제로 많은 매듭 장인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이제는 전통 매듭의 명맥을 잇는 사람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전통 매듭의 자리는 협소해졌다. 매듭은 실을 염색하고 풀고 짜고, 엮으며 끈목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매고 죄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공예품으로, 100년 전까지만 해도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과 손으로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어려운 작업으로 그만큼 품도 많이 들고 수고로움을 요하는 것이었다. 매듭은 고구려 고분벽화 황해도 안악3호분의 초상에 나타난 방장을 묶은 끈과 술, 고려시대 <고려도경>의 자료를 통해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고려 불화와 조선시대 탱화에서도 매듭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명주실을 꼬고 합사하고 염색해서 끈목을 만드는 ‘다회장’과 끈목을 두 가닥으로 늘어뜨리며 각종 모양으로 매듭을 맺는 ‘매듭장’을 각각 두어 매듭의 수요를 충당하기도 했다. 1950년 경만 해도 서울 광희동에는 매듭장, 다회장들이 모여 살았는데 생활양식의 변화로 이제는 맥이 끊긴 상태다. 오로지 우리 것을 지킨다는 신념 하나로 그 험난한 세월을 이겨내며 전통 매듭을 지켜온 일가가 있으니,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정봉섭 선생의 일가다. 정봉섭 선생은 그의 아버지 故정연수(1968년 매듭 초대 기능보유자 인정) 선생과 어머니 故최은순 선생(1976년 매듭 기능보유자 인정)으로부터 전수받아 2006년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정봉섭 선생 그리고 그의 딸 박선경 전수교육조교로 전통 매듭이 이어지고 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아주아주 어렵게 매듭을 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색실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어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까지 가족들이 다 매달려서 해도 일이 끝이 없었어요. 학교 갔다 오면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하기 바빴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게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어요.” 정봉섭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나서부터 지금까지 매듭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 삶이 되었다고.
그의 아버지 故정연수 선생은 일찌감치 생계유지로 매듭을 시작했지만 누구보다도 전통매듭에 대한 철학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우리나라 초대 매듭 무형문화재인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매듭이 금지되었을 때도 화장실에 숨어 매듭을 지으면서 우리 것을 지켰고 이러한 그의 마음은 그대로 부인인 故최은순 선생과 딸 정봉섭 선생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도 그러셨고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일을 하다 보면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도 굳이 그걸 택하지 않으시고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전통방식 그대로 매듭을 지으셨어요. 우리 것을 지켜내고, 하고있다는 어떤 소명의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러한 마음은 정봉섭 선생도 마찬가지요, 현재 전수 교육조교를 하고 있는 딸 박선경 씨도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전통방식 그대로를 지켜오셨어요. 염색부터 끈목작업까지 그리고 수를 놓는 방법까지도 옛 방식을 지켜내셨고 저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라는 박선경 씨. 이제 그의 역할은 전통방식의 매듭을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그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그의 몫이라 했다. 전통방식 그대로의 우리 매듭과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매듭 연구가 한 일가를 통해 지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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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목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매고 죄는 수법, 또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형태를 매듭이라고 한다. 정봉섭 장인의 매듭은 유독 술이 가늘고 섬세하다.
주로 18합이나 20합 정도를 한 올로 하는 가는 실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드는데 섬세하게 글자를 새겨
넣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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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은 인간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정교한 예술 중 대표적인 전승공예품이다. 아쉬운 것은 명맥을 잇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데에 있지만, 정봉섭 장인의 가족들이 다행스럽게도 전통 방식 그대로의 매듭을 지으며 전통공예를 잇고 있다. 그래서 아름답고 빛나는 매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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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인내의 인생
“매듭은 인내심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요. 한번 실을 잡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해야 하는데 작업의 기술보다도 어쩌면 오랜 시간 앉아 몰두하는 그 시간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정봉섭 선생은 그렇기 때문에 매듭을 배우러 왔다가도 얼마 못 견디고 떠난다고. 또 조금 배웠다고 해서 작품이라며 이름을 내는 것이 좋지 않아 이제 가르치는 일은 접고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딸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하고 있다. 한두달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듭은 생사를 가지런히 해 베 보자기에 싸서 비눗물에 푹 삶는다. 그런 다음 풀기가 빠지고 나면 얼레로 조심스럽게 풀어 우선 겨자로 실을 미색으로 염색한다. 그다음 원하는 갖가지 색으로 염색하게 된다. 염색 후에는 식초물에 담가 변색을 방지하고 윤기를 나게 해야 한다. 염색이 끝나면 엉킴이 없도록 아기 다루듯 실을 발리고 풀어줘야 하는데 이 과정도 만만치 않게 수고를 요한다. 여기까지 마친 명주실을 두어 가닥씩 연사해 증기에 쪄서 말린 뒤 끈목을 만들어야 매듭지을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일이 많은 작업인지 혼자서는 도무지 엄두 못 낼 일이라는 것이 가늠해진다. 그러니 자연히 가족들이 함께 매달리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과정을 예나 지금이나 직접 손으로 하는 정봉섭 선생의 매듭은 유독 술이 가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다. 주로 18합이나 20합 정도를 한 올로 하는 가는 실을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데 노리개의 술 머리 부분(봉술)을 금실로 감고 글자 문양을 섬세하게 넣으려면 가는 실이 적합하기 때문. 정봉섭 선생은 앞뒤로 금실을 넣어 문양을 넣는 기술의 복원과 전승으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어령 선생은 그의 책 <한국인의 손, 한국인의 마음>에서 매듭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맺고 풀고 잇고 끊는 끈의 관계로 나타낸 것이 한국인의 인간관이다. 이러한 끈의 사상을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호로 나타낸 것이 바로 매듭이라는 수예품이다. 매듭의 형태는 코, 몸, 손의 세 가지 요소로 분절된다. ‘코’는 옷고름의 코처럼 부드러움과 여유를 나타낸다. 그러나 ‘몸’은 가닥을 결합시키고 묶음으로써 매듭의 강함을 나타낸다. ‘손’은 아무리 복잡하게 맺어진 것이라 해도 다시 풀 수 있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구조 속에서 매듭은 아름다운 구조를 갖게 되고 인간이 만나 서로 인연을 맺기도 하고 원을 풀기도 하는 운동을 한다. 매듭은 끈의 문화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마음을 시각화한 것이다.”라고.
매듭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긴 실을 연사해 매듭을 지어 장수와 복을 기원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한 해가 가고 있다. 전통공예로서의 매듭도 잘 묶여야겠지만 우리 사는 인간관계의 매듭도 잘 지어지고 맺어져야 할 때다. 오랜 시간 정봉섭 선생의 일가에서 이어져 내려온 매듭처럼 말이다. ![](/upload/logo_r[670][555].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