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도(文字圖), 동양사상을 만나다
모던한 전시관에서 전시되거나, 고가의 금액으로 거래되어 재테크의 효과도 볼 수 있는 요즘 그림은 한마디로 비싸다. 금전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흠집이 날까, 온도나 습도 때문에 작품이 망가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과거에도 고급문화로서의 회화는 존재했다. 하지만 정통성을 인정받은 고급문화로서의 회화가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그림을 향유하며 집 안팎 단장뿐 아니라 나쁜 귀신을 쫓거나, 복을 바라며 민화의 사용이 더 빈번했고 작품의 수도 많았다. 민화를 사용하는 계층도 서민에 국한되지 않았다.
“민화를 서민만 향유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인식이죠. 민화는 사대부와 왕실 귀족들도 사용할 정도로 대중적인 회화였어요.” 조선민화박물관의 오석환 관장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만을 회화로 인정하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권위적인 인식이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민화의 한 종류인 ‘문자도’는 광해군 때 중국으로부터 처음 문자도가 유입된 이후 사대부가 소장해 실생활에 사용하던 그림이었다.
대부분의 민화가 기복 신앙을 표현했듯 문자도 역시 장수를 뜻하는 수(壽)와 행운을 뜻하는 복(福)을 조형화한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를 비롯해 부귀(富貴), 다남(多男) 등을 바라는 길상적 의미의 문자도, 용(龍), 호랑이(虎), 거북이(龜)를 글자와 그림과 결합해 주술적 의미를 담은 수호적 문자도가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한국적 특색이 강화되면서 문자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그려진 것은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이다. 효제문자도란 유교적 윤리관을 담은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글자를 8폭 병풍으로 만든 것으로 아이들 방이나 선비들의 사랑방 등의 생활공간을 장식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문자도의 제작 기법은 일반적인 모필(毛筆)로 그려진 전통기법과 가죽 붓으로 쓰는 혁필화 기법, 인두로 종이를 지져서 그리는 낙화기법 등이 있었다. 오늘날 지하철역이나 고궁 근처에서 두꺼운 붓으로 글씨를 쓰면 무지개 색깔의 글씨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혁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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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제문자도
상징 속에 담긴 끝없는 이야기
처음 문자도를 접하면 기묘한 한자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익숙한 한자인데 뜬금없이 한자의 획에 꽃과 새, 대나무, 물고기와 같은 사물이 그려져 있어서다. 이에 오석환 관장은 ‘문자도에 그려진 사물들은 각각의 해당 글자와 관련이 있는 민담, 설화, 시경 등에 등장하는 것’들이라 말한다. 글자를 그림으로 꾸미되 그 그림 역시 글자의 뜻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효제문자도의 첫 번째 글자인 ‘효자도(孝字圖)’는 주로 잉어와 죽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잉어는 진(晋)나라 선비 왕상이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어머니께 잉어를 잡아 드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잉어와 함께 그려진 죽순은 오(吳)나라의 맹종의 이야기로 한겨울 노모를 위해 눈물로 죽순을 자라게 했다는 맹종설순(孟宗雪筍)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문자도의 두 번째 글자인 제(悌)도 마찬가지다. 우애를 뜻하는 ‘제자도(悌字圖)’에는 할미새와 산앵두가 등장하는데 산앵두는 <시경> ‘소아편’의 첫 문장인 ‘환하게 빛 넘치는 산앵두 꽃 피었네(常 之華)’에서 나온 산앵두를, 할미새는 ‘들의 할미새 호들갑 떨 듯 형제 어려움을 급히 구하네(在原 兄弟急難)’라는 문구에서 가져왔다. 한편 산앵두는 줄기가 길어 꽃이 아래로 늘어지면서 꽃받침이 함께 모여 환하게 피는데 <시경>에서 이를 우애 있는 형제로 표현한 것이다. 이 외에도 충(忠)은 용과 잉어, 신(信)은 중국 설화 속 등장하는 상상의 새인 청조와 흰 기러기, 예(禮)는 거북이와 책을, 의(義)는 도원결의를 뜻하는 복숭아와 <시경>의 관저편에 나오는 두 마리의 새로 각 글자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처럼 효제문자도의 여덟 글자는 중국이 신화, 민담, 고사는 물론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시경>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동식물까지 사용해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효제문자도는 다른 민화와 달리 교육적 의미가 강했다. 효제문자도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인성교육을 시킨 일종의 그림 교과서인 셈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병풍에 그려진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전해 들으며 효도·우애·충절·교신·예절·의리·청렴·부끄러움이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람이 살아가면서 갈고 닦아야 할 도덕규범을 생활 속에서 공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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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
백 개의 모습을 가진 수(壽)와 복(福)
효제문자도와 달리 기복신앙과 벽사적 의미를 담았던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는 한국에 중국의 문자도와 관련이 깊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 2년(1610년), 명나라 장관은 남평현감 조유한에게 백수도(百壽圖) 한 폭을 선물하고, 조유한은 이를 진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중국으로부터 문자도가 한국에 정착한 것이 백수백복도인 것이다. ‘수(壽)’가 100개, ‘복(福)’이 100개가 병풍 가득 그려져 있는 백수백복도는 반복되는 문양이 하나도 없는데 새·나무·물고기·별자리·곤충 등은 ‘수(壽)’를, 대나무·나뭇잎·칠보·박쥐은 ‘복(福)’을 장식하는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 좋은 운세가 따르길 바라며 그린 길상문자도에서는 복숭아나무, 감나무, 불수(佛手), 영지 등을 글자와 결합해 문자도를 구성했다.
지역에 따른 효제문자도의 차이도 눈여겨볼 만하다. 문자도에서 지역적 특색을 보이는 곳은 강원도, 제주도, 안동 3곳. 우선 강원도 문자도는 황노인이라 불리는 석강 황성규의 작품을 말한다. 황노인의 효제문자도는 2단 구성이 특징으로 조형화된 문자의 상단이나 하단에 산수, 책거리, 화조 등의 민화가 결합된 형태다. 제주도 문자도는 섬이라는 제한된 지역적 영향과 자연적 영향으로 인해 가장 독특한 효제문자도를 보여준다. 글자의 경우 기본적인 서체가 아닌 행서체가 복합된 형식으로 조두형(鳥頭形) 서체가 기본이 되었는데 글자 획 내부에는 파도물결 문양 사이에 꽃과 구름 문양을 그리고, 마지막 획의 끝부분은 새의 부리로 표현했다. 제주도의 조두형 서체는 시대가 지나면서 구름 단청문양처럼 변화되거나 물고기, 꽃, 산, 괴석의 형태로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 문자도의 가장 큰 특징은 3단 구성이다. 효제문자를 가운데 배치하고 상단과 하단에 그림을 배치했는데 이때 상단에는 용궁을 닮은 건물을, 하단에는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안동지역 문자도는 글자가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게 특징이다. 한편 문자도에서 모란과 국화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것도 안동문자도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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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제문제도 8폭병.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어려서부터 효제문자도 등의 병풍 앞에서 학업에 열중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문자도에 표현된 도상과 관련된 고사를 통해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도덕강령을 배웠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다
몇 해 전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크게 유행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에 숨겨진 암호로 숨겨진 진실로 다가선다는 설정이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영화의 설정은 허구였지만 민화에는 실제로 여러 가지 암호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암호를 해독하면 하나의 길로 인도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갖춰야 할 정신과 예의가 그것이다.
“민화라는 것은 외형적인 아름다움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이 가진 이야기의 의미입니다. 그림을 통해 마음과 가치를 전하는 거지요. 문자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효제문자도는 이야기를 통해 인성교육을 시켰던 교육용 그림이라 이야기의 교훈이 훨씬 직접적이죠.” 민화란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만나고 이야기 속에 담긴 지혜와 교훈을 읽는 것이라 말하는 오석환 관장. 그는 민화가 가진 교훈과 가르침이 극대화 된 게 문자도라고 설명한다. 일각에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엄격했던 신분사회가 흔들리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유교적 가치를 강화하고자 효제문자도가 대중화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효제문자도의 가치를 단지 과거의 윤리라 치부할 수만은 없다. 시대와 사회적 질서와 규범의 변화에 따른 현실적인 재해석은 필요하지만 효도·우애·충절·교신·예절·의리· 청렴·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민화가 우리의 현재적 삶과 소망을 통해 발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듯 문자도에 담긴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생활 속에 실천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될지 모른다. ![](/upload/logo_r[670][578].png)
Mini Interview
조선민화박물관 오석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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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로 삶을 그리다
지난 2000년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민화 전문 박물관인 강원도 영월의 조선민화박물관은 오롯이 오석환 관장 개인의 힘으로 일궈낸 곳이다. 취미로 시작했다 민화 속에 담긴 이야기에 빠져 민화 전문가가 되었다는 그가 현재까지 수집한 민화의 수는 4,000여 점. 그중에는 왕실 유물로 추정되는 ‘구운몽도’와 고종의 어진을 그린 조선 말 화가 채용신의 민화 ‘삼국지연의도’도 있다. 몇 해 전부터 민화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강원도 영월까지 찾아오는 관람객의 수가 많이 늘면서 더 많은 이들에게 민화를 알리고자 최근에는 전남 강진에 민화박물관 분관을 준비 중이다. 한편 조선민화의 해외 전시는 오 관장의 오랜 꿈이다. 전시 비용이 만만치 않아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민화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서민의 삶에서 태동된 만큼 민화는 생활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며 경고하는 오석환 관장. 민화가 전통이 아닌 문화로서 존재하고, 예술로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민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 민화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오석환 관장, 그가 있기에 한국 민화의 내일은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조선민화박물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김삿갓로 432-10/ 033-375-6100 / www.mi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