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불의 조화로 태어나다
![](/upload/tr201108-1-9.jpg)
음식을 담는 그릇 중 최고의 재질은 바로 자기(磁器)다. 자기는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럽고 장식적인 면에서도 미감(美感)이 뛰어나 음식을 맛깔스럽고 아름답게 담을 수 있다. 이러한 자기를 성공적으로 생산하는 일은 인류의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흙과 불을 조화롭게 조절하여 자기를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10세기 이전에 중국 이외의 다른 국가에서 자기를 만들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이처럼 자기 생산은 당시에 하이테크(Hi-Tech) 산업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 어떻게 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자기 생산 단계 이전에 도기 문화를 일구었다. 이미 삼국시대 말기부터 저화도(低火度) 연유(鉛釉) 도기를, 통일신라시대에는 고화도(高火度) 회유(灰釉) 도기를 제작하여 유리질의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제작 여건을 갖췄다. 특히 통일신라 말에 음다飮茶 문화가 유행함에 따라 표면이 거칠고 수분을 흡수하는 도기보다 자기를 선호하는 풍조가 확산되어 자기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10세기경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던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는 고화도 도기 제작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 절강성의 월요(越窯)로부터 자기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수요에 따른 공급의 이치다. 이때 운영된 가마는 경기도 용인 서리, 북한의 황해도 원산리, 봉암리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기를 제작하는 가마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이유는 당시 정치 환경이 혼란스러운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라는 틀 안에서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요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은 경기도 중심의 중부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에 있어서도 지리적으로 근접하였으며, 좋은 태토(胎土)와 풍부한 시목(柴木), 그리고 주 소비 계층이 수도인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도 생산지의 입지 조건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고려는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을 주요 생산지로 삼아 꾸준하게 자기 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상감象嵌 청자, 동화銅畵 청자, 금채金彩 청자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 사람들의 미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아름다운 청자를 제작하게 된다.
![](/upload/tr201108-1-10.jpg)
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
사물의 형태를 그대로 형상화한 고려시대 대표적인 상형청자로 가장 사랑받는 작품.
![](/upload/tr201108-1-8.jpg)
(좌)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 1146년 승하한 인종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고려청자의 비색을 감상하는데 좋다. 과장됨 없이 단정한 아름다움이 특징.
(우) 국보 116호. 청자 상감 모란넝쿨 무늬 주자 상감청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곡선은 유려하고 단정하며 기품이 서려있다.
고려비색, 고려청자
고려청자의 특징을 단적으로 손꼽는다면 비색(翡色)과 상감(象嵌) 그리고 상형청자(象形靑磁)를 들 수 있다. 송나라 태평노인은 『수중금(袖中錦)』에서 “건주(建州)의 차, 촉(蜀)의 비단, 절강(浙江)의 차… 고려비색(高麗翡色)이 모두 천하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고려청자를 칭송하였다.
명대(明代)의 『격고요론(格古要論)』 역시 ‘고려요(高麗窯)’ 조에 “청자 위에 흰 꽃송이가 있는 것은 감히 값을 매길 수가 없었다”고 하여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고려청자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가 머금고 있는 신비로운 색, 비색은 형태·문양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된다. 청자는 흔히 ‘옥(玉)’과 비교되는데, 청자의 탄생 이유가 바로 옥기(玉器)와 같은 기물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옥은 군자(君子)를 상징하고 부귀(富貴)를 나타내며, 악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믿어 예로부터 귀하게 여겼다. 이처럼 청자는 비취빛의 옥기를 모델로 했으므로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푸른색을 발현하고자 고려시대 장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전하는 고려시대 문헌기록에서 ‘비색(翡色)’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1123년에 송나라 사신단 일행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도기(陶器)의 푸른빛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하는데, 근래 들어 제작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비색이 청자색을 일컫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비색을 확인할 수 있는 청자로는 <청자 참외 모양 병>(국보94호)을 들 수 있다. 이 청자병은 1146년에 승하한 인종(仁宗)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전하는데 고려청자의 비색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유색(釉色)은 옅은 옥빛이 감돌지만 반투명하여 태토색이 살짝 드러나 은은한 품격을 자아낸다. 이것은 화려하되 중국 청자의 과장된 아름다움과는 달리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을 준다.
12세기는 고려청자의 전성기다. 이때 청자의 제작기술은 절정을 이루었는데, 앞서 언급한 비색과 함께 상형청자가 만들어져 고려청자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상형청자는 사물의 형태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상형청자로는 <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국보95호)가 있다. 이 향로는 고려청자를 대표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크게 뚜껑과 향을 피우는 몸체, 받침부로 구성되는데 각 부분마다 각종 기법이 망라되어 고려청자의 화려함과 뛰어난 제작기술에 매료된다. 뚜껑은 복을 기원하는 칠보무늬를 투각하여 몸체에서 피운 향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몸체는 꽃잎 하나하나를 각각 따로 만들어 붙이는 공력을 들였다. 이 향로의 백미는 받침부에 있는 작은 토끼다. 세 마리 토끼가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데 앞발을 모아 공손한 자세를 갖추고 있다. 토끼의 눈매 또한 예사롭지 않은데, 가는 음각선으로 눈매를 표현하고 철화 안료로 점을 찍어 청자 토끼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1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향로를 등에 진 채 지내온 이 영민한 토끼는 영원성을 간직하고 시대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상감기법이 구현된 이후부터 고려청자는 더욱 화려해졌다. 무늬를 파내고 그 안에 자토나 백토를 감입하여 시유한 후 가마에서 구우면 흑백대비가 선명한 상감청자가 완성된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신이자 문인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연적이나 베개, 술잔을 소재로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청자술잔에 관련된 시에서 상감으로 된 꽃무늬를 새긴 것이 하늘의 조화를 빌린 솜씨라며 극찬하고 있다. 국보 116호인 <청자 상감 모란넝쿨 무늬 주자>는 상감청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곡선은 유려하고 단정하며 기품이 서려있다. 몸체는 문양을 제외한 바탕면을 파내고 그 안에 백토를 상감한, 이른바 역상감(逆象嵌)기법을 구현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고려청자의 매력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고려청자가 지닌 신비한 아름다움에 대해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upload/logo_r[670][583].png)
비가 개고 안개가 걷히면 먼 산마루 위에 담담하고 갓 맑은 하늘빛이 산뜻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하늘색의 미묘한 아름다움은 곧잘 靑磁의 푸른 빛깔에 비유되어 雨後晴天色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무심코 고려청자의 이 푸른빛을 들여다보노라면 정말 비 갠 후의 먼 하늘처럼 마음이 한결 조용해진다 (『독서신문』, 1971).